곧은 고래는 굽게〔曲突〕고치고 굴뚝에 쌓아놓은 땔감은 옮겨〔徙薪〕놓아야 화재를 방지할 수 있다는 말로,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중국 漢武帝 때의 대장군  光은 무제를 20년이나 가까이 모셨으나 勤愼하여 자그마한 실수도 범한 일이 없었으며 무제가 죽음에 임박하여 8세가 된 太子를 보좌해 달라는 詔書를 남겼고 이 태자가 昭帝가 됨으로부터 漢나라의 정치를 곽광이 마음대로 하게 되었다. 곽광은 좌장군 上官桀의 아들 安을 사위로 삼았으며 그에서 난 딸이 皇后가 되니 이는 곧 곽광의 외손녀이다. 상관걸이 사돈인 곽광에게 사적인 부탁을 하였다가 부당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곽광이 國事를 專制하는데 불만을 품고 곽광을 몰아내려고 몇 차례 계획을 세웠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다시 長公主와 협의하여 곽광을 연회석에 불러들여 자객을 시켜서 줄이도록 하고 임금을 바꾸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상관걸과 관련자가 모두 곽광에게 처형되었다. 元平 원년(BC 74)에 昭帝가 後嗣도 없이 죽자 곽광은 昌邑王 賀를 맞이하였고 賀는 즉위하자 酒色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곽광은 매우 걱정이 되어 중신들과 의논하고 太后에게 아뢰어 창읍왕 賀를 추방하고 宣帝를 세웠다. 이때 곽광의 아들 禹와 조차 雲은 중랑장이었으며 조카 山은 봉거도위로서 胡越兵을 거느렸고 두 사위는 東西宮의 衛尉으며 나머지 형제, 매부, 외손들도 모두 大夫의 지위에 있어 곽광의 근친들이 조정의 요직을 독식하고 있었다. 곽광은 宣帝에게 親政을 하시도록 건의하였으나 사양하였으며 모든 정무는 먼저 곽광에게 알린 뒤에 임금에게 아뢰게 되자 곽광은 더욱 겸허하여 예의를 깎듯이 하였다. 그러나 곽광이 죽자 그 아들 禹가 아버지를 이어서 博陸候가 되자 그 사촌 山과 사치를 숭상하여 거대한 邸宅과 衣服 및 車馬는 王家에 비기리만큼 화려하였으나 아무도 감히 그를 탓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런 지음에 茂陵의 徐福이라는 사람이 『사치하면 불손하여지고, 불손하면 반드시 윗사람을 얕보게 되며 윗사람을 얕보는 행위는 반역입니다. 폐하께서는 곽씨네의 先代의 공로를 생각하여 멸망에는 이르지 않도록 적당히 억제하도록 하십시오』하고 세 번씩이나 상소를 하였으나 선제는 선뜻 바다들이지 아니하였다. 宣帝가 즉위할 때의 皇后는 許氏였고 곽광의 부인 顯이 막내 딸 成君을 위하여 남편 모르게 비밀히 典醫를 매수하여 허황후를 독살하고 남편 곽광에게 요청하여 成君을 황후로 들여보냈었다.
최종편집:2025-05-15 오후 05: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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