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가 쓴 ‘부활’에 대해 프랑스의 로맹 롤랑은 이렇게 평가했다. “이 소설은 톨스토이의 예술로서의 유언이다. ‘전쟁과 평화’가 그의 원숙기를 장식한 것과 같이 ‘부활’은 그의 일생의 마지막에 군림하고 있다. 이것은 최후의 꽃이며 가장 높고 또한 최후의 높다란 봉우리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상은 짙은 안개 속에 가리워져 있다. 톨스토이는 세상과 자기 세상과 자기 인생과 과거의 잘못을 이 봉우리에서 내려다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예술적 성서이다”
‘부활’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재판소 배심원으로 나온 네플류도프 공작은 살인 절도 혐의로 재판을 받는 한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그가 청년 시절에 그의 두 숙모가 후견인으로 돌보아 주었던 소녀로서 자기에게 강제로 정조를 빼앗기고 헌신짝처럼 버려졌던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 카추샤였던 것이다. 그녀는 임신을 하고 하녀 겸 양녀로 있던 그 집에서 쫓겨나 매춘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악명 높은 사창가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금 법정에 서 있는 것이다.
체면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네플류도프는 그녀의 타락의 원인이 자기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음을 깨닫고 카추샤에 대해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그리고 귀족사회에 속한 자기 생활 태도에 대해 깊은 의혹을 품게 된다. 동시에 남의 노력으로 포식하게 되는 토지 사유 제도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된다. 그는 그 순간부터 그때까지 거짓의 가면을 쓰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청산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까지 계속해온 불의의 관계를 끊고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었다. 심지어 약혼녀인 귀족의 딸 미시와도 헤어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영혼의 부활이 가능할 수는 없었다. 그는 카추샤의 감형 운동에 나섰다. 그녀를 위하여 감옥에 드나드는 동안에 도움을 바라는 무고한 죄수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돕는 일에 힘썼다.
그리고 옥중으로 찾아가서 자신의 내력을 밝히고 옛 일을 후회하고 있다고 고백한 다음 마침내 카추샤가 타는 시베리아 행 죄수 호송차를 따라간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지만, 카추샤는 지나친 참견이라는 듯 단호하게 이것을 거부하고 만다. 카추샤는 네플류도프에게는 자신의 운명보다는 그의 양심을 안정시키는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를 단념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난폭한 말을 한다. “도대체 어떤 하나님을 찾아냈단 말입니까? 당신은 나를 미끼로 삼아 자기가 자신을 구하겠다는 것이군요. 이 세상에서는 나를 장난감으로 삼아 즐기더니, 저 세상에 가서도 나를 미끼로 삼아 구원을 얻어 보겠다는 속셈이군요?” 그는 이런 모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시베리아 유배의 길을 떠나는 그녀를 따라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행히 그의 끈질긴 수고의 결과로 그녀에게 내렸던 판결이 취소된다. 그는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수용소로 뛰어갔다. 그러나 카추샤는 이미 함께 수감되어 있는 정치범 시몬손의 청혼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시베리아로 떠나는 길이었다. 네플류도프가 카추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용서하세요” 라고 겨우 들릴까말까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 사람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히 계세요”가 아니라 “용서하세요”라고 말했을 때 사팔뜨기의 신비한 눈동자와 괴로운 듯한 미소를 보면서 네플류도프는 그녀가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언제까지나 그와 관계를 갖게 되면 자기가 그의 일생을 파멸시키게 될 것이므로 시몬손과 같이 그에게서 떠나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헤어지게 되는 것이 정말 슬펐던 것이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의 손을 꼭 쥐었다가 재빨리 몸을 돌리고 말았다.
네플류도프는 홀로 남아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녀와의 관계는 끝났지만 그녀로 인해 눈뜨게 된 영혼의 세계는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는 영혼의 부활을 위해 성서를 폈다. 이제 앞으로는 진실만 추구하리라고 결심하는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아침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이러한 영혼의 부활을 결단하는 새 아침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