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운(牧雲) 한인규 박사는 성주 출신의 자랑스러운 출향인으로 우리나라 교육계를 이끌어 온 거물급 인사이다. 이 책은 저자가 기복이 심한 인생을 외롭게 살아오는 동안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엮어낸 것으로, 학문생활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간한 문집 전 5권 중 제1권 ‘행복은 강물처럼’에 수록된 내용이다. 멀고 험한 인생 역정을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그 길을 열어 왔는 지를 저자가 경험한 대로 진솔하게 써 내려가 잔잔한 감동과 신선한 충격을 주고, 독자들로 하여금 기쁨으로 가득 찬 삶, 선하게 사는 방법을 배우게 한다.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행복은 강물처럼 밀려오고, 그 속에서 우리네 인생은 구름처럼 흘러간다”고 저자는 시처럼 말하고 있다. 【편집자 주】
처음 해보는 일이라 수박밭에 접근하려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대구의 명문 K중학교에서 공부하던 K학형이 돌아와서 자기 집 수박밭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지금은 컴퓨터 박사로 유명한 S학형과 내가 냇가에 앉아서 놀다가 갑자기 수박을 먹고 싶은 생각이 났다. 우리는 K학형이 지키고 있던 수박밭으로 가서 수박서리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수박밭에 접근하려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 K학형이 원두막에 드러누워서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고 외부로부터의 침입자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설령 들킨다손 치더라도 우리 모두는 동기동창인데 감히 우리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생각하면서 캄캄한 수박밭에 들어가서 큰놈으로 두 개씩 골라 따 가지고 걸음아 날 살리라고 도망쳐서 처음 떠난 그 냇가로 돌아왔다. 무사히 돌아 온 것을 안도하면서 따온 수박을 주먹으로 처서 갈라보니 모두 설익은 것들이고 맛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는 그 후 이 친구를 볼 때마다 그날 밤 몰래 따다먹은 수박 생각이 나서 늘 미안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장사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K학형은 크게 밑진 장사가 아니었다. 왜냐면 그 후 50년 이상을 속죄하는 뜻으로 그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면 언제나 밥값을 내가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감사한 것은 이 K학형은 아직도 우리가 자기 집 수박을 무상(?)으로 갖다 먹고 그 죄 값을 지금도 치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밀은 우리가 무덤에 갈 때까지 가슴에 묻어 두리라.
이런 이야기에는 다른 종류의 것도 있다. 이때는 이 수박서리에 얽힌 세 사람의 동기생 외에 또 다른 동기생 한 사람이 더 합류하게 된다.
그것은 어느 겨울방학 때로 어느 날 밤에 우리는 이웃동네 어느 집에 가서 닭서리를 해오기로 하였다. 가슴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 나는 중도에서 돌아오고 나머지 세 친구는 어느 할머니가 애지중지 키우던 닭을 잡아오는 일에 성공하였다. 할머니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 날 저녁에 참으로 오랜만에 몸보신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훔쳐다 먹은 그 닭고기가 어찌 그리 맛이 있었는지 그 후에 나는 그 닭고기만큼 맛있는 닭고기를 먹어본 기억이 없다.
2년쯤 세월이 지난 다음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어서 마침 우리 집에서 기르고 있던 토끼 두 마리를 그 할머니 집 닭장에 넣어 드리고서야 우리는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었다.
이것이 내가 소년시절에 우리 친구들과 함께 저지른 절도행각의 전부임을 고백하는 바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이런 절도행각을 한 두 번은 저지르면서 자라는 건지, 아니면 우리만 이런 못된 짓을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음 호에서는 ‘어린 시절의 생일 파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