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3월 미국 뉴욕 주택가에서 키티 제노비스라는 한 여성이 야간당번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왔을 때가 새벽 3시 15분. 아파트를 향하여 걸어가는데 어떤 남자가 그녀의 등에 칼을 깊숙이 찔렀다.
그녀가 외쳤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러자 아파트의 집집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범인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아무도 계단 아래로 내려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그 여자를 내버려두시오”라는 소리만 들었다고 했다. 범인은 그 자리에서 도망을 치고 칼에 찔린 제노비스는 몸을 이끌고 어느 서점 문 앞에 쓰러졌다.
아파트의 불은 꺼지기 시작하고 주위는 조용해졌다. 자신의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가던 범인은 아파트의 창문들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는 다시 돌아와 그녀를 찔렀다. 제노비스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파트에는 다시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또 도망을 쳤다. 제노비스는 간신히 몸을 이끌고 자신의 집이 있는 아파트 건물 복도 안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하지만 몇 분 후에 또 다시 그 남자가 찾아와 결국 그 여인은 살해당했다.
이 살인사건은 새벽 3시 15분에서 50분까지 약 35분 동안에 일어났다. 세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벌어진 이 사건은 도움을 청하는 비명에 중간 중간 끊겼던 것이다. 한 여인이 칼에 찔려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듣고 창가에서 구경만 한 사람은 모두 38명이었다. 이 사건 직후 경찰은 목격자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심문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나는 누군가가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선한 의도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다가 본의 아니게 잘못된 경우 그 과실에 대하여 민ㆍ형사상 책임을 면해주는 소극적인 내용과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서 그 사람이 피해를 당할 경우, 돕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적극적인 내용으로 되어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노상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어 가는 것을 버리고 갔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또 어떤 레위인이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미워하는 한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중에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어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자는 처벌하고,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은 그가 이웃을 돌보는 과정에서 어떤 과실이 있다고 해도 그에게 법적인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는 법이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관심을 법으로 강제해야 할 만큼 삭막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한 관심을 조금만 더 가졌더라면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 많은 희생자를 낸 강호순 연쇄살인과 같은 범죄행위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사건이 일어난 현장들이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이나 외진 곳이 아니라 차들이 수없이 지나가는 대로변이었다. 승용차 안에서 피해자를 성폭행하려 할 때 반항하면 마구 때리고, 얼굴에 피를 흘리며 고함을 질러도 수없이 지나가는 차량들이 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스타킹으로 목을 졸라 죽인 후 승용차에 싣고 가서 대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암매장을 해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범인이 피해자의 은행카드를 가지고 현금지급기에서 현금인출을 할 때 가발을 쓰고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고, 순서를 기다리던 사람과 작은 시비까지 있었는데도 누구하나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설사 수상하게 생각해도 내 일이 아니니까 모른 척 해버린다.
사회가 남의 일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보니까 이러한 범죄가 일어나도 속수무책이다. 공권력이 미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옆에서 폭력을 당하고 불의한 일이 일어나도 괜히 참견했다가 나만 손해볼지도 모른다는 극히 이기적인 생각에서 몸을 사리고 외면해버리는 사회분위기가 범죄자들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고 있다. 연쇄살인의 희생자들은 강호순 혼자서 죽인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무관심이 함께 그들을 죽게 했다.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자. 오늘의 남의 일이 내일의 나의 일이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은 남의 일을 내 일처럼 관심을 가지라는 말이다. 이웃에게 저지르는 가장 큰 죄는 그들에게 대한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버나드쇼는 “무관심은 비인간성을 대표하는 비인간적인 감정이다”고 설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