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에 대한 예보는 이미 추석 전부터 방송을 통해 들
었다. 고향 성주에 차례를 지내러 가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
지 않았다. 그저 가을이면 우리나라를 지나가는 연중 한 두
개 불어오는 태풍 중 하나일 것이라고 여겼다. 추석 연휴에
비가 와서 다니기 불편하고 교통이 혼잡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정도를 했다. 무엇보다도 이름에 속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태
풍의 이름이 매미라니 때로는 극성스럽게도 들리지만 매미울
음처럼 바람이나 한바탕 시원하게 불고 폭우나 한번 뿌리고
지나가려니 했다.
태풍 하면 사라호가 떠오른다. 사라호는 거대하고 무서운 태
풍의 대명사였다. 사라호는 반세기 동안 뇌리에 자리 잡은 부
동의 태풍 챔피언이었다. 이 태풍에 대해서는 내 개인적으로
기억이 확실한 것도 있고, 희미하고 불확실한 것도 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기록을 찾아보니 1959
년 9월 17일 추석날이다. 사라호 태풍이 추석날 불었던 것은
확실하다. 왜 선명하게 기억하느냐 하면 종조부(從祖父) 집을
작은집이라고 부르는데 작은집에서 추석 차례를 지내고 음복
(飮福)을 하는데 집 뒤 제실의 아름드리 수양버들이 스르르
넘어져 물먹은 담장을 무너뜨리고 지붕을 베고 누어 툇마루와
마루문을 넘어 젯상에 가지를 내밀어 톱을 가져가 끊어내고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기 때문이다.
사라호 태풍은 추석날 불어왔고 태풍 매미도 추석은 비꼈지
만 추석 다음 날이다. 반세기 동안의 태풍 챔피언 사라호, 그
리고 미국의 언론도 1세기 내의 최강의 태풍이라는 매미 이
둘이 모두 추석을 전후하여 찾아오니 추석 태풍은 조심 또 조
심해야할 일이다. 하기사 추석도 음력이라 양력에 비하면 한
달 정도의 편차를 가지니 막연하게 추석에 부는 태풍이 위험
하다는건 말이 안될 수도 있다. 한편 생각하면 바닷물은 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니 가을의 보름은 태풍이 발생하고 발달하
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상의 변화에 간
여하는 요인은 너무나 다양하고 계산이 힘들어 기상을 설명하
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의 과학이니, 나노과학이니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라호 태풍 때 이것만이 아니라 학교에 가다 되돌
아왔다는 흐릿한 생각, 집에 오다가 버드나무 밑에서 위험한
일을 당할 번한 기억 등이 떠오른다. 그래서 기록을 찾아보니
사라호 태풍이 15일부터 18일 사이에 전국을 강타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그 거대한 태풍은 전조도 다른 태풍과 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추석 전날 나는 학교에 갔다. 그때는 지금처
럼 길이 포장되고 다리가 튼튼히 놓인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그래서 큰물만 지면 흙탕물이 출렁거리는 시내를 두고 양편에
이른 아침부터 이산가족처럼 사람들이 모인다. 아래쪽은 등교
하려는 학생들, 학교 쪽은 학생을 마중 나온 선생님, 읍내로
등교를 하려는 중고등학생들이나 내를 건너간 사람들이다. 물
이 많아 내를 건너기 위험하고 계속 비가 올 것 같아 보이면
선생님은 모두들 집으로 가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러면 우리
는 물이 출렁거리는 시내 건너편에서 종례를 겸한 전달사항을
듣고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와야한다.
이날도 냇가에서 종례를 하고 집으로 온 것으로 기억한다.
이날은 추석 전날이고 사라호 태풍 하루 전날이라 그런지 집
으로 오는 길에 바람이 많이 불고 비도 수시로 쏟아졌던 것으
로 기억한다. 그때는 우산이란 게 없었다. 비닐이 보급되지 않
았던 가난한 시절이라 우비라야 삿갓과 도롱이가 고작이었다.
도롱이는 비를 맞아 물을 머금으면 무거워 어른들이 농사일
할 때나 사용하고 우리는 주로 삿갓을 쓰고 다녔다. 간혹 부
잣집 도령쯤 되어야 일본풍의 울긋불긋한 그림이 그려진 종이
에 들기름을 먹이고 대나무를 세공하여 살이 촘촘한 지우산
(紙雨傘)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여간해서 이런 지우산은 아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는데 삿갓을 쓰고 10리나 되는 학교
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삿갓을 머리에 얹도록 둥
글게 만든 미사리 테에 눌려 머리털이 다 빠질 지경이고 집에
다 올 때쯤은 그럭저럭 한나절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날은
추석 전날이라 학교가 멀고 가뜩이나 등교하기 싫은 날인데
비바람까지 심하게 불었으니 조그만 마을에 몇 안되는 국민학
생 중에 학교에 간 건 나 혼자 뿐인지 2동에 사는 친구와 함
께 되돌아 와서 1동과 2동으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헤어져 혼
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시절은 개근하기가 참 힘들
었다. 요즈음처럼 전 학급 학생이 거의 전부가 개근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국민학교 6년 개근이나 6년 정
근상은 참으로 위대한 상으로 느껴졌고 졸업식 때 이백 명이
넘는 학생 중에 그런 상을 받는 학생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고 상품도 가장 두툼한 사전이나 양이 가장 푸짐한 공책을 주
던 시절이었다.
바람이 너무 불어 한 손으로는 미사리 테를 잡고, 또 한 손
으로는 삿갓 앞부분을 힘껏 밀며 오다가 너무 힘들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방천 뚝에 까마득하게 높이 자란 미루나무에 잠
시 기대어 숨을 돌리려고 하는데 그 큰 나무가 어째 심상치
않다. 나무가 흔들리고 잔가지와 잎들이 떨어져 멀리 날려가
고 그러다 내가 기대고 있는데 나무가 스르르 넘어가는 느낌
이다. 소스라치게 놀라 삿갓이고 무엇이고 팽개치고 달려나와
멀찍이 서서 보니 그 큰 미루나무가 45도 정도 비스듬이 누워
버린다. 결국 그 나무는 태풍 뒤에는 논 가운데 완전히 눕고
말았다. 태풍이 지나간 뒤 라디오 방송 또는 영화의 뉴스, 어
쩌다 얻어보는 조각난 신문 등을 통해서 얻어들은 사라호의
피해가 전국적으로 얼마나 컸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
다.
태풍 매미는 추석 다음날 새벽에 불어왔지만 그 전날 심한
전조는 없었고 비만 좀 많이 내렸을 뿐이다. 지금의 학생들은
추석 연휴에다 금년 토요일은 대부분 학교가 깜짝 방학까지
해서 최소한 5일이 추석 연휴가 된 셈인데 사라호가 불던 그
시절에는 추석 하루만 휴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마
음의 부담없이 차례를 지낸 것으로 기억되는 걸 보면 추석이
휴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만약 매미가 불던 날 연휴가 아니
라서 등교한다해도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이나 삿갓하
나 달랑 주고 학교에 가라고 할 부모가 없을 것이고 버스를
태운다 자가용으로 등교시킨다 하며 부산을 떨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렇게 사람을 중하게 여기니 태풍 때문
에 노약자가 특별히 많이 죽었다거나 하는 보도는 없다.
이번 추석 연휴 마지막날인 12일날 나는 고향에서 대구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비도 뿌리고 했지만 그렇게 심하진 않았
다. 성주에서 대구까지는 전혀 밀리지도 않았다. 집에 와서 옷
을 갈아입고 집 주위를 둘러보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추석
날 저녁은 증조부 제사 날이라 잠을 설친 까닭도 있고 또 추
석을 쇠느라 좀 피곤했던지 10시쯤에 잠에 빠져들었다. 자는
데 옥상에서 무엇이 깨지는 듯 구르는 소리가 나자 자다가 놀
란 아내가 일어나 무슨 소리냐고 잠을 깨우기에 일어나 주위
를 둘러보았다. 창문턱이 잘못되어 비바람이 심하게 치면 방
으로 물이 스며들어오는데 그걸 닦아내고는 이내 또 잤다. 아
침에 일어나니 바깥이 좀 어수선하긴 했지만 별일이 없는 듯
했다.
추석 후유증인지 피곤하여 방송도 안 듣고 신문도 TV 뉴스
도 보지 않아서 대구의 태풍 상황이 어떤지 몰랐다. 13일 아
침 먹고 골목에 나가니 누군가가 신천이 엉망이라고 했다. 자
전거를 타고 불이나케 신천으로 달려나갔다. 직장에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아침이나 저녁에 운동을 신천에서 하기 때문에
관심이 크다. 신천대로 쪽 고수부지를 따라 대봉교에서 중동
교까지 가는데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었다. 전부 물을 담았거
나 씻겨 내려가거나 찌거기가 걸려 있었다. 온통 찟겨지고 깨
어지고 부러져서 가히 신천이 빈사상태라 할만하다. 다시 콘
크리트 통로를 따라 위쪽으로 성북교까지 올라갔다가 신천 동
로로 내려왔다. 물이 지난 곳은 모두 마찬가지로 폐허를 방
불케 했다. 동로는 아예 교통이 두절되고 있었다. 그래서 자동
차 길을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는데 도로는 진입로마다 뻘흙이
뒤덮고 있어 차가 진입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도로는 상하지
않았지만 동로 주변의 조경이나 축대, 스테인레스로 만든 경
계 철책등은 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지경이었다. 도로
바닥에도 몇군데 흙이나 부유물 찌거기들이 있었다. 그전에도
신천을 되살리고 가꾸려는 정성을 들여 왔지만 민선 시장이
들어서서 신천 가꾸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인 결과 동로가 개
통되고는 신천이 아주 볼만한 곳이 되었다. 나같은 사람도 신
천이 대구의 명소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대구시가 10
년 넘어 가꾸어 왔는데 이번 태풍에 폐허가 되었다.
태풍 매미
태풍이 온다해도 이름이 매미라서
모시 옷섶 부비듯 가볍게 날개 부비며
서늘한 바람이나 한줄기 불고 가려니.
그도 아니면
이어도 어름에서 고개를 홱 돌려
일본으로 길을 바꾸어 가려니 했다.
세시간 남짓 험상궂은 마왕의 형상으로
백구천창(百口天窓) 물주머니 마구 흔들고
거친 바람 뿜어대며
하늘이 비좁다고 풀무질하고
봉두산발 머리채
미친 듯이 휘두르다 달아나 버렸다.
그것 뿐인데
대구는 결단이 나
염색공단 물담고
논공 공단 흙탕물 뒤집어쓰고
십년도 넘어 공들여 가꾸어온 신천은
거꾸로 서서
내장을 있는대로 활활 털어내버렸다.
삿갓 미사리에 머리털이 다 빠지고
안고 바람 피하던 미루나무 휘청 기울고
아름드리 수양버들 스르르 넘어져
추석 차례상 머리에 가지를 슬쩍 올려놓던
반세기의 이야깃거리 사라호 태풍도
매미 날개 바람에 꽁지 빠지게 달아나고 있다.
이름을 곱게 지어주어도
이름값은 간곳이 없고
매섭고 독하기가 바늘 끝이다.
모시적삼 생각나는
이름만 깔깔한 태풍 매미는
이제 한세기 쯤은 넉넉히
무섬증을 자아올리는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사라호를 물리치고.
사라호도 어쩌면 태풍 챔피언의 자리를 매미에게 물려주고
뒷방으로 물러나야할 지 모른다. 하룻밤 거센 위세를 떨며 우
리들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준 태풍 매미에게 받은 상처도 적
극적으로 치유하고 털고 일어서야할 때가 되었다. 이번 태풍
에 큰 슬픔과 재산상 피해를 입은 수재민들에게 심심한 위로
를 보낸다.
사라호 태풍의 위력은 최대 중심 풍속 초속 85미터, 평균 초
속 45m이며, 이번 매미의 위력은 순간 최대 풍속이 60m/sec
로 1904년 현대적인 기상 관측 이래 최고를 기록하고, 9월12
일 20시 경남 사천 부근 해안에 상륙한 최저기압은 950헥토파
스칼로 59년 사라호의 기록을 제쳤다고 하며 내륙에 상륙한
뒤에도 950h㎩대의 강한 세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사라호가 남긴 피해는 사망자와 실종자가 987명, 당시의 화
폐 단위로 약 1662억원(약 4천 5백만 달러)에 이르며, 이번 매
미로 인한 피해는 18일 현재 사망자와 실종자가 127명, 재산
피해는 4조 3천 320억원이라고 한다.
위의 기록들을 인용했지만 사라호와 매미를 비교하여 정확
한 판단을 내리기가 곤란하고, 보도들을 보면 덩치라는 규모
면에서는 매미가 사라호에 뒤지지만 여러 가지 위력은 매미가
앞선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외형의 비교보다 사라호와 매미의 인명 피해나
경제적 손실의 측면을 보면 이 둘은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인명 피해에서는 사라호 때가 매미보다 8배에 가까울
정도로 월등하며 경제적 피해 면에서는 매미의 피해가 엄청나
다.
이러한 재난 앞에 인간의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이 느껴지지
만 우리들은 이런 자연재해를 당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특히 정부의 정책 입안과 집행에
서 이점이 간과되면 안된다. 재난이 인재(人災)라는 말이 나와
서는 안되겠다. 만약 일본에 매미 정도의 태풍이 지나갔다면
인명 피해가 모르긴 해도 50명 이내가 될 것이다. 일본은 인
구면에서 남한의 3배에 가깝고, 국토 면적은 4배게 가깝다. 그
런데도 불구하고 매미 정도의 태풍에도 인명 피해가 50명이
넘는 사례가 거의 없고 일반적인 태풍에는 인명 손실이 10명
이 넘는 경우도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재난에 대비
하는 자세를 철저히 하는 것은 선진국의 한 바로메터가 될뿐
아니라 인간 존중과 국가 경제의 질을 높이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성산인 배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