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게 재 순 서
1. 우리의 고유문화, 조선왕실의 장태의례
2. 唯一無二! 태실의 완전한 군집지 星州
3. 고유의 소중한 문화자산, 태실은 지금!
4. 태(胎)문화, 성주의 세계화 초석으로!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주체성과 독자성을 가진 독특한 문화를 가꾸고 지켜왔다. 그러나 급속히 진행된 도시화와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데는 소홀한 결과 점차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다만 최근 세계화 개방화가 진척되면서 성장의 그늘에 밀려 있던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에 대한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는 실정으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려는 노력이 시급하다.
농업생산성 증대에만 주력해오던 기존의 방법으로는 개방화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져 가는 현 시점에서 사라져 가는 자연과 문화의 매력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농촌의 경쟁력’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지역이 보유한 특색 있는 문화를 살펴보고 이를 지역발전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로는 조선시대 왕실 풍속의 하나인 ‘장태의식’을 꼽을 수 있는데, 이는 동양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문화로 태(胎)는 곧 생명문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星州는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예향이자 백두대간의 끝자락이 감도는 반도의 길지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태실(사적 제444호 세종대왕자태실)이 집중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문화적 보고(寶庫)이다.
이러한 성주의 전통문화를 되짚어 봄으로써 작게는 지역발전의 돌파구를 찾고, 크게는 성주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문화로 대중화되지 않은 우리의 태 문화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문화 정체성을 확보한다는 측면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본지에서는 총 4회에 걸쳐 우리의 고유문화인 태(胎)문화와 조선조 생명문화의 원류, 예향 星州가 자랑하는 ‘세종대왕자태실’에 대해 집중적으로 보도키로 한다. 먼저 첫회(제437호)로 선조들의 생명 존중의식을 엿볼 수 있는 조선왕실의 장태의례에 대해 상세하게 살펴본다.【편집자주】
생명 탄생의 가치 중시한 전통시대
우리 옛 선조들은 ‘천지지간(天地之間) 만물지중(萬物之中)에 人間이 가장 귀하다’고 역설했다. 국조(國祖)이신 단군의 건국이념 홍익인간(弘益人間), 신라 화랑도의 세속오계(世俗五戒) 가운데 살생유택(殺生有擇)은 전통시대의 이러한 인간존중의 뜻을 잘 담고 있다.
더구나 우리 선조들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했고 사인여천(事人如天) 또 인내천(人乃天)이라고도 했다. 인간을 하늘과 같이 존귀한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이 인간의 탄생은 그 잉태에서부터 그야말로 축복이자 희망의 순간이다.
우리 선조들은 소중한 인간 생명의 잉태를 기원하며 천지신명 특히 삼신할머니에게 간절하게 기원했고 잉태된 생명을 훌륭하게 양육하고자 태중에서부터 교육을 하기도 했다. 이른바 태중교육이라는 태교까지 진지하게 힘썼다.
이 소중한 축복이자 희망인 인간은 어머니의 복중(뱃속)에 있을 때 태반에 보호되고 있다. 태반은 태아에 영양을 공급하고 태아를 안락하게 보호하는 조직이다. 이 태(胎)는 출산과 더불어 산모의 몸 밖으로 나오게 된다.
우리 선조들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태를 뒤처리했다. 오늘날에는 모두 병원에서 출산하고 또 자동적으로 그 병원에 자의든 타의든 태의 처리를 맡기게 된다. 하지만 전통시대에는 이 태가 나올 때부터 신중하게 다루고 있다. 인간을 존귀하게 여긴 결과 태를 허술하게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여겨진다.
장태문화…우리나라의 고유한 전통
태(胎)의 처리는 출산 전·후부터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태를 산모와 신생아에서 분리하는 순간부터 왕실은 물론이고 민간에 이르기까지 소중하게 그 뒤처리를 했다.
이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그 육성의 기능을 맡고 있는 가정에서 큰 기쁨의 하나가 바로 새 식구인 아기의 탄생이고, 가장 큰 우환은 면역력이 약한 아기의 신변이기 때문이다.
즉 아기의 탄생만큼이나 아기 스스로 외부의 저항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계속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기의 안위이며, 더 나아가 장성한 후에도 누구보다도 안정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기원의 마음이 다소 점복적인 의식으로 표현이 되는데 3 7일간은 외인의 출입을 삼가토록 했으며 특히 不淨人(부정인)의 왕래를 금했다. 뿐만 아니라 아기의 태를 수습해서 길일을 가려 좋은 땅에 묻거나 불에 태웠다.
이유는 사람이 모태에 있을 때는 태로 인하여 자라게 되는 것이며, 더욱이 그 어질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함이 모두 태에 관계 있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의 경우는 대개 정결한 곳에서 태우거나 땅에 묻거나 또는 물에 띄우게 된다. 어떤 의식이나 절차도 없이 단순한 뒤처리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태를 보관하는 시설 등 기타 유형의 문화는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왕실에서는 태처리를 國運(국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 예를 갖추어 제도로써 마련돼 있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자녀를 출산하면 여지없이 태반을 땅에 매장한다. 땅의 경우도 관상감에서 소위 길지라 선정한 명산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에 의하여 묻었다.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유형의 시설을 ‘태실’이라 부른다.
태실이란 일종의 매장문화이다. 이러한 태와 관련한 매장문화는 앞에 ‘세종실록’에서와 같이 일찍이 당나라는 물론 명나라에도 있었다.
이로 보아 중국도 오랜 세월동안 장태의 풍습이 있었다고도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오래도록 체계적으로 장태문화가 지속된 나라는 우리나라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태실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전통문화라 할 수 있다.
조선조, 왕실 장태문화를 살펴본다
민간과 왕실을 막론하고 가장 일반적인 태처리는 산에 묻는 방법이다.
민간의 경우 대체로 태를 간단하게 항아리나 단지에 묻어버림에 그친다. 어떤 시설을 만들지 않고 그대로 잊혀진다. 그리고 태봉산에는 한 사람의 태만이 아니고 대대로 자자손손의 태를, 그 조장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태를 묻는다. 고향을 일명 ‘태자리’로 부르는 것도 대체로 태어난 곳이 고향이고 또 그 고향에서 태를 처리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민간과는 달리 왕실에서는 간소하든 성대하든 규모를 갖춘 태를 묻는 시설 즉 태실을 만든다. 장태가 신생 왕자녀의 장래의 운명까지 결정하고, 또는 왕자나 왕세자의 경우는 장래 국가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다는 믿음까지 있었다. 이러한 의식과 관념은 신앙적인 것으로까지 진전되지는 않았지만 전통적인 풍수지리설의 하나로서 우리 선조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태실과 관련된 명칭으로 태봉(胎封)이 있다. 이 명칭 속에는 일반적인 태실이 아닌 ‘봉해진 태실’, ‘봉이 가해진 태실’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왕실의 태를 봉안하는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하면 그 위용을 더하기 위해 다시 석물로 가봉했는데, 이를 ‘태봉’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장태 절차
가. 태의 보관
왕비나 후궁이 왕자·녀를 출산하면 태를 즉시 항아리에 넣어 산실 내의 길한 방향에 모시어 둔 다음 3일(혹은 5일)이 지난 후 이레(7일)안에 세태일(洗胎日)을 정해서 태를 깨끗하게 씻었다.
산실 내부에서도 태 항아리를 놓는 위치는 산 자리를 꾸밀 때 미리 점을 쳐서 길한 방향을 잡았다.
1)세태(洗胎) 및 태의 보관
세태 하는 날이 되면 의녀가 산실의 태 항아리를 들고 나와서 질자배기에 옮겨 담고, 월덕(月德) 방향에 있는 샘물을 떠다가 1백번 씻은 다음 향온주라는 술로 다시 씻어서 태항리에 넣었다.
태를 넣을 때는 먼저 작은 태 항아리의 바닥에 개원통보(開元通寶)란 동전을 글자 면이 밑으로 가도록 깐다. 이것은 ‘으뜸이 열린다’는 뜻이 신생아기씨(新生阿只氏)에게도 전달되기를 축원하는 의미라고 본다.1)
동전 즉 개원통보 한 개를 조그만 항아리 밑바닥 중앙에 깔고 세척한 태를 그 위에 넣은 다음 기름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고 빨간 끈으로 단단히 밀봉한다. 이것을 다시 더 큰 항아리에 넣는데, 먼저 항아리 밑에 솜을 깔고 태 항아리를 넣은 다음 다시 그 주위의 공간을 솜으로 메운다.
솜을 태 항아리의 입 높이까지 가득 채운 뒤 초주지(草注紙)로 다시 그 위를 덮는다. 이리 하여 안의 태 항아리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킨 뒤 다시 겉 항아리 입에서 손가락 하나 길이쯤 떨어지는 정도까지 솜을 채운 뒤에, 감당(甘糖)으로 원편(圓片)을 만들어 항아리 입에 넣고 화기(火氣)를 들여 밀폐하고 다시 그 위에 마개를 막아 완전히 밀봉한다.
그리고 빨간 끈으로 항아리 사면을 매고, 빨간 패에 ‘모년 모월 모일 모시 중궁전 아기씨 태야(某年某月某日某時 中宮殿阿只氏胎也)’라 쓰고 다른 쪽에는 3제조와 의관이 서명하여 달아맨다. 그리고 넓적한 독 안에 넣고 삭모전(빨간 끈)을 두르고 뚜껑을 닫아 길 방에 안치하였다가 태실을 선정하여 정중하게 봉안했다.
나. 장태지 선택
왕실의 태실 위치는 매우 엄격하게 선정했다. 태실의 선정은 관상감에서 담당하는 것이었으나 실제 신생 왕손의 장태지를 선정할 때는 태실증고사를 지방에 보내 선정하게 했다.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 9월 초8일의 기록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