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의 역사를 뒤돌아본다 성주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과 가야산의 수려한 경관이 어우러져 찬란한 문화유산과 전통을 꽃피운 고장으로 조상들의 삶의 흔적과 혼이 살아 숨쉬는 유서깊은 고장이다. 선사시대의 지석묘(고인돌)로부터 가야시대의 고분과 산성,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유적지,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유교문화에 이르기까지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충절이 깃들어 있는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지금까지 성주에서는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해 보면 이 시기에 성주에도 사람이 살았으리라 추측되며 고인돌, 선돌 등의 청동기시대 문화유적을 비롯하여 철기시대의 유적도 나타나고 있다. 삼한시대의 성주는 소국으로 발전했으며, 이것이 모체가 되어 6가야의 하나인 성산가야가 됐다. 성산가야는 성주성산동고분군을 위시한 대규모의 고분유적을 남기기도 했으나 적어도 6세기 중엽에는 신라에 복속되어 일리군에 속한 본피현이 됐다. 757년(경덕왕)에는 신안현으로 개칭하여 성산군에 속하게 했고 신라말기에는 벽진군으로 불리었다. 고려시대의 성주는 이총언을 위시한 호족들이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것으로 인해 940년(태조 23) 경산부로 승격됐으며 광평군, 대주 등으로 고을의 위상이 변화되다가 1018년(현종 9)에 지경산부사가 되면서 1군 14현을 관할하게 되어 그 위세를 크게 떨쳤다. 한편 고려말 1308년(충렬왕 34)에 고을의 위상이 경산부에서 성주목으로 승격하게 되는데, 이때 처음으로 星州라는 지명이 나타나게 됐다. 1310년(충선왕 2)에 경산부로 강등됐던 성주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조에 목(牧)으로 다시 승격됐으며 반역죄·강상죄 등으로 몇 차례 현으로 강등됐다가 다시 목으로 환원되기도 하는 등 고을의 위상에 변화가 있기도 했으나 대체적으로 목사(정3품)가 관할하는 목으로 유지됐으며 1895년 근대적인 지방행정구역 개편시에 성주군이 됐다. 조선시대 문화재로는 교육기관 및 관아가 남아 있는데, 관아로는 성주 성산관이, 교육기관으로는 성주향교·회연서원·청천서당 등이 있다.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 태봉 정상에는 세종대왕의 여러 왕자의 태를 안장한 세종대왕자 태실이 있고, 성곽으로는 가야시대에 축성된 산성으로 추정되는 독용산성과 가야산성이 남아 있다. 그밖에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북비고택·한주종택·교리댁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와 고유한 생활풍습을 간직하고 있어 전통민속마을로 주목받고 있다. …태실 문화 전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의 왕실 풍속 중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특별한 형태를 가진 것이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행해지는 장태의식이었다. 중국에서 시작됐다는 말도 있지만 삼국시대, 고려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조선시대에는 다른 나라, 다른 시대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문화이다. 즉, 장태의식은 우리 성주만이 갖는 자랑스러운 문화이다. 민간에서는 땅에 묻는 경우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출산한 후 마당을 깨끗이 한 뒤 왕겨에 태를 묻어 몽긋몽긋하게 태운 뒤에 타고난 재는 강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왕족의 경우에는 태를 태우지 않고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시키는 방법으로 처리했다. 이때 이를 주관하는 관상감에서 소위 길지로 선정된 명산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는데,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설을 태실이라 불렀다. 또 태봉은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할 경우에 격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가봉비를 세운 것으로 임금의 태실을 말한다. 한편 태실을 조성한 곳이나 그 인근 마을을 태봉, 태실 혹은 태장부락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태실의 조성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지도에 표기된 태봉 혹은 태실을 각 도별로 대충 열거해 보면 남한 땅에만도 20여 개가 넘는다. 태실이 명당에 들어선 이유? 조선시대 왕실에서 왕자와 공주의 태를 전국의 유명 명당을 찾아 쓴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풍수지리의 핵심이론이기도 한 동기감응론을 따른 것이다.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여 왕업의 무궁무진한 계승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유래했다. 둘째 기존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의 명당을 빼앗아 태실을 만들어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요인을 없애자는 의도였다. 태실 자리나 근처는 명당이라고 소문이 난 곳이 많았는데 이러한 곳에 태실을 설치하면 그 일대에 있는 일반인들의 묘는 모두 옮겨야했다. 셋째 왕릉이 도읍지 1백리 안팎에 모셔진데 반해 태실은 전국 도처의 명당을 찾아 조성됐다. 왕조의 은택을 일반 백성에까지도 누리게 한다는 의도, 즉 왕조와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보자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때문에 왕조에서는 태실의 관리에 정성을 기울였다. 성주, 명당의 터로 이름 날렸다 서기 1401년 10월 8일 용암면 대봉리 조곡산에 태종의 태가 안태되면서 성주가 목(牧)으로 승격됐다. 태종의 태로 인해 성주는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고 현(縣)에서 고을 주(州)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 이후 1438년부터 1442년에 이르는 기간에 월항면 인촌리 산 8번지에 세종대왕의 적서 17왕자와 비운의 주인공 단종의 태를 갈무리했고, 그 후 문종이 즉위한 후 서기 1451년 3월 6일 단종의 태를 가천면 법림산에 옮겨 안치함으로써 성주는 태실을 세 곳이나 갖는 명당의 터로 이름을 날린 것이다. 태실은 나라에서 유명한 지관을 보내 길지를 점지하여 태를 안치하는 것으로 전국에서도 길지를 골라 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태실이 많다고 하는 것은 자연 좋은 땅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그렇기에 조선을 침략한 일제에서는 민족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에 있는 태실을 모두 철거하여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마구잡이로 모아 놓았다. 따라서 현재는 태실 또는 태봉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을 뿐 보존되어 있는 것이 극히 드물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 8번지 선석산 아래에 있는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이다. 이 곳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장태문화의 정수를 보여 주는 유일한 곳으로 의미가 상당하다. 성주는 태실(胎室)의 고장이다 태종의 태봉은 등극 원년인 1401년 함경도에서 하륜이 윤신달(지관)을 데려와 용암 대봉리 조곡산에 터를 잡으며 조성됐다.1) 하지만 1928년 일제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명목을 내세워 전국의 많은 태실을 강제 철거하면서 태종의 태봉 역시 8월 12일 철거했고, 현재는 그 흔적만 찾을 수 있다. 또한 가천면 법전리 법림산에는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재위 1452∼1454)의 태(胎)를 봉안하는 태실이 있다.2) 서기 1443년(세종25) 12월 11일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처음에 원손의 태를 경상도 성주에 안치하였는데 그 도국 안에 이장경의 묘가 있었으니…”라는 기록으로 보아 단종의 태를 처음에는 여러 대군들과 함께 선석산에 안치했음을 알 수 있다. 단종의 태실은 대군들의 태실 옆에 기울어져 있고 또한 보토(補土) 한 곳이었다. 지금까지 성주 이씨들의 중시조인 이장경의 묘를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을 만들기 위해 지금의 ‘오현재’로 이장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것은 잘못 알려져 온 사실이다.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 때문이 아니라 단종의 태실 도국 안에 이장경의 묘가 있다하여 여러 번의 논의 끝에 1444년(세종26) 1월 5일에 세종의 명에 의해 이장경의 묘를 옮기게 된 것이다. 이장경의 묘소 이전 문제로 인해 당시 풍수학 제조이던 이정녕(李正寧)은 고신(告身)만 빼앗게 하고, 사정(司正) 정앙(鄭秧)은 장(杖) 60대에 도(徒) 1연을 속(贖)바치게 하며, 정광원(鄭廣元)은 3등을 감하는 벌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1450년 9월 8일(문종 원년)에 풍수학에서 동궁 즉 단종의 태실 자리를 경기도와 하삼도에 다른 길지를 택하여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결국 1401년 월항 선석산에 조성됐던 단종 태실은 문종 즉위 후인 1450년 법림산으로 옮겼으며, 그 후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보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1458년(세조4) 7월 8일 예조에서 선석산에 있는 금성대군의 태실과 법림산에 있는 단종 대왕의 태봉을 철거하기를 주청하여 단종의 태실을 없애 버리면서 태석들을 깨어 버렸다.3) 이와 관련 경남 사천시에서는 세종대왕의 태봉 앞에 놓여진 조그만 태실을 단종 태실지라고 주장하며, 경남 기념물 제31호로 지정·운영해 오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단종 태실이 사천이 아닌 성주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지난 1928년 서삼릉으로 이봉하기 위한 태실 철거 시 사천 곤명에서 나온 것은 단종이 아닌 인성대군의 지석으로, 경남도기념물 제31호인 단종 태실지는 예종대왕의 왕자인 인성대군의 태실임이 자명하다. 이는 인성대군 태실이 요절한 왕자의 태실이었기에 제대로 된 관리가 없이 잊혀져 있다가 세종대왕 태봉과 관련돼 어느새 세종대왕이 원손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태실 곁으로 이전했다는 식의 잘못된 구전에 의해 사실로 굳혀지게 됐다는 것. 실제로 일제가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 명산에 흩어져 있던 조선시대 태실(胎室)을 옮겨와 조성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태실에는 문종 다음에 단종은 없고 세조의 태봉이 있으며, 다만 옆쪽에 조그맣게 인성대군의 태실이 조성되어 있다. 이와 관련 사단법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발행한 ‘조선의 태실’이라는 책에서도 ‘경남 사천에 있는 태실은 결단코 단종의 태실이 아니다’고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아무튼 지금 선석산에는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과 함께 단종의 태실이 있다. 이것은 단종의 태실을 법림산으로 옮겨 갈 때 태석을 땅을 파고 묻어 두었던 것을 후일 이 곳을 복원하면서 땅을 파 찾아낸 것이다. 태실의 군집지, 세종대왕자 태실 국가지정 사적 제444호인 세종대왕자 태실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태실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성주 월항 선석사 앞에 있는 서진산(棲鎭山)에는 유난히 자녀가 많았던 세종대왕의 왕자들의 태가 묻혀 있다. 이 곳에는 세종대왕의 열여덟 왕자 중 세자(후에 문종)를 제외한 열일곱 왕자의 태실과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만든 태실 석물 1기가 있다. 이때 세종대왕이 왕자들의 태실을 한곳에 조성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풀이된다. 첫째 세종의 백성을 위한 마음 즉, 민본사상에 의한 것이다. 왕자들이 태어난 시기는 달랐으나 태를 모았다가 1438년부터 1442년까지 5년 간에 걸쳐 한번에 조성됐는데, 이는 백성들의 노역에 대한 어려움을 덜고자 추진한 것이라는 것. 실제로 왕릉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인원 6천명 정도가 동원됐는데, 태실 조성에도 이와 비슷하게 5천여명이 동원됐으니 백성들의 어려움도 컸을 것이다. 둘째 형제들의 태를 한데 모음으로써 형제 간에 우애 있게 지내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 곳 태실은 평균높이 140c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지하에 석실을 만들어 그 속에 태항아리와 태 주인공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을 넣고 지상에는 어느 왕자의 태실이라는 표식을 세운 형태로 되어 있다. 전후 2열로 구분되며 뒷줄에는 소헌왕후 심씨의 적자인 대군 7명 진양대군(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원평대군, 영흥대군과 약간 떨어져 단종의 태실이 있다. 또한 앞줄에는 빈군의 소생인 10명의 군(君, 화의군·계양군·의창군·한남군·밀성군 등)의 태실 11기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전열의 태실은 11기이지만 실상은 10왕자의 태실인데, 그 이유는 영해군의 이름이 후일 장에서 당으로 고쳐지자 태실을 다시 세움에 따른 것으로, ‘장’이라 적힌 태비는 ‘당’이라 적힌 태비가 세워질 때 매몰됐던 것을 지난 1977년 복원 시에 다시 찾아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울러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은 뒤 이를 반대한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과 계유정난에 죽은 안평대군의 태실과 태실비 등은 산 아래로 파 던져졌으나 1975년 道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정부에서 보수할 때 5기의 기단석을 찾아내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시 예조판서 홍윤성이 찬한 가봉비를 세조의 태실 앞에 세웠으나4) 지금은 비문이 지워져 알아 볼 수 없으며 민담에 의하면 세조의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붓고 돌로 갈아서 거의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향토사 연구가인 이덕주 초전초 교장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의해 백성들이 비문을 훼손해서 현재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풍문일 뿐”이라며 “태실이 조성되면 일반인들이 반경 540m 이내에는 들어갈 수 없게 금표를 하고 군사들이 지켰기 때문에 조선이 패망하기 전까지는 백성이 태실에 접근할 수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세조의 비문은 영조 때 이미 50% 정도 마모됐다고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와 있음을 볼 때, 이는 재질의 문제로 봄이 더욱 올바른 접근”이라고 전했다. 1977년 태실에 대한 정비사업과정에서 유물이 출토됐는데 분청인화문개 2점(경북대학교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각 1점 소장), 분청인화문완 1점(국립대구박물관 소장), 평저호(平底壺) 1점(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지석(誌石) 3점(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기획취재3팀 -------------------------------- 1)태종 1년 10월 8일(계해) 003/경산부 조곡산에 태(胎)를 봉안하다. 경산부(京山府) 조곡산(祖谷山)에 태(胎)를 봉안하였다. 민제(閔霽)가 함주(咸州)에 가서 태함(胎函)을 받들고 경산부에 이르러 태실(胎室) 시위 품관(侍衛品官) 4인과 수호인(守護人) 10호(戶)를 정하였다. 2)문종 1년 신미(1451, 경태 2) 3월 6일(을사) 안태사 허후가 동궁의 태실을 성주 가야산에 옮겨 모시고 수호하게 하였음을 아뢰다. 안태사(安胎使) 예조 판서 허후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이제 동궁(東宮)의 태실(胎室)을 성주 가야산(伽倻山)에 옮겨 모시고 그 사역(四域)을 정하였는데, 동쪽과 남쪽을 각 9천6백보(步), 서쪽을 9천5백90보(步), 북쪽을 4백70보(步)로 하여 표(標)를 세우고, 또 품관(品官) 이효진(李孝眞) 등 여덟 사람과 백성(百姓) 김도자(金道者) 등 여섯 사람을 정하여 수호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3)세조 4년 무인(1458, 천순 2) 7월 8일(계사) 주상의 태실을 봉안한 성주 선석산의 다른 태실을 옮기거나 철거할 것을 청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성주(星州) 선석산에 주상(主上)의 태실(胎室)을 봉안(奉安)하였으나, 그러나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과 난신(亂臣) 이유(李瑜)의 태실(胎室)이 그 사이에 섞여서 자리하였고, 또 법림산에 노산군(魯山君)의 태실(胎室)이 있으니, 청컨대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실(胎室)을 옮기고, 유(瑜)와 노산군(魯山君)의 태실은 철거(撤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노산군: 조선 제6대 단종(端宗)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노산군으로 강등. 4)영인본 7책 549면 세조가봉비문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세종 장헌 대왕께서 즉위한 21년(1439)에 유사에 명하여 땅을 점치게 하고 대군과 여러 군의 태를 성주 북쪽 20리 선석산의 산등성이에 갈무리하게 하고 각각 돌을 세워 이를 표하였는데, 주상의 성태(聖胎)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 있어 표하여 이르기를, ‘수양대군 【휘(諱)】의 실(室)’이라 하였다. 지금은 하늘의 명(命)을 받들어 왕위에 오른 지 이미 8년이 지났으므로 예관(禮官)이 급히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따로 자리를 보아 어태(御胎)를 이안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형제가 태(胎)를 같이 하였는데 어찌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하시고, 의물(儀物)을 설치하기를 청하여도 역시 윤허하지 아니하시며 다만 표석을 없애고 비(碑)를 세워 기록할 것을 명하여 힘써 일을 덜게 하셨다. 아아! 우리 주상께서는 하늘을 받들고 도(道)를 몸받아서 문(文)에 빛나시고 무(武)에 뛰어나시고, 전하의 총명(聰明) 예지(叡智)하시고 겸손(謙遜) 검약(儉約)한 덕은 이루 다 이름하여 말할 수 없으나,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그 겸손하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지위가 더욱 높을수록 덕이 빛나는 지극함을 알 수 있으니, 조선 억만년의 무강(無彊)한 기초가 더욱 길이 아름다울 것을 또한 여기에서도 점칠 수 있을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아아! 빛나는 오얏나무(李, 이씨), 천 가지 만 잎사귀라. 산매자꽃(형제를 가르키는 말) 함께 비치는데 홀로 빼어나 밝게 빛난다. 용이 날아 하늘에 오르니 세상이 맑고 편하며 우뚝한 신공(神功)은 제도를 갖추고 밝게 하였다. 돌아보건대, 성태(聖胎)를 예전대로 두고 옮기지 아니하여 예관(禮官)이 상청(上請)하여 옛 법을 따르기를 원하였으나 겸손하여 윤허하지 않으시니 검소한 덕이 더욱 빛난다. 귀부(龜趺)가 높이 섰으니 억만 년의 표석이라, 선산(禪山)이 높고 높아 그 맑고 아름다움을 간직하였으니, 천지(天地)와 같이 길고 오래도록 창성하고 빛나리라.’고 하였다.”
최종편집:2025-05-16 오후 01: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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