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宗大王子胎室이 갖는 의미는? 한국에 있어 태를 봉안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김유신의 장태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후 고려의 왕실에서 태 봉안 양식이 성립된 후 조선시대까지 그 맥락이 이어진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태봉에 태를 봉안하기 위한 석물 조성을 한 것은 한국에서만 행해졌던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라 할 수 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와 함께 왕과 태자에 대한 태실만을 조성하던 고려시대의 태봉안 양식이 변화하여 왕과 왕비 및 그 자녀의 태실을 조성하기 시작한 조선시대 최초의 왕자태실일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서 예시한 태실 조성의 최적지에 자리잡고 있다. 결국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 초기 태실 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 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그렇다면 태실이 이와 같이 온전하게 현존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일제시대 이왕직에서는 태실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한 곳에 모았다. 1928년 8월 15일 세조의 태실(胎室) 석물 등을 가져가려 할 때, 당시 월항면 면장이었던 도문희(都文熙)가 기념물로 영구 보존하기를 희망함으로 무상으로 양여하고 별지 양수증을 징수하고 양도함에 따라 왕자태실은 지금까지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성주만의 문화자산, 태실은 지금! 세종대왕자태실은 1975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됐다가 郡에서 역사적 가치와 규모 등에 있어서의 우수성을 근거로 지난 2002년 문화재청에 국가지정문화재로의 승격을 추진, 2003년 3월 6일자로 ‘국가사적 제444호’로 지정 받았다. 이후 성주 선석산의 태실(胎室)에는 외래 방문객들의 발길이 잇고 있으며, 군에 따르면 인접한 한개마을 등과 연계해서 연간 3만여명 정도의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고 밝혔다. 郡에서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높이기 위해 지난 2004년 5천만원을 들여 태실 진입로 정비 및 안내 입간판 정비사업을 시행했으며, 2명의 문화관광해설사를 태실 안내소에 상시 배치해 태실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유래와 전설·야사 등을 소개하며 태(胎)문화 즉 생명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아울러 문화재에 대한 정기적 점검을 통해 태실을 찾는 지역민과 외지 관광객의 관람을 위한 기본요건을 충족시켜 오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동안 문화재의 보존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문화재의 내재적 가치 발굴과 효용 극대화를 위한 관광자원화 촉진에는 취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문화자원을 보존·활용하여 관광자원화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탐색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독특한 생활사(生活死) 문화 문화유산(文化遺産)이란 그 지역의 정서와 생활양식을 반영하는 흔적으로, 각 지역마다 여러가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각각의 지역마다 대표성 있고 독특한 문화적 가치가 담긴 문화를 발굴하고 이를 관광자원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것이 안동의 유교문화와 경주의 불교문화, 김해와 고령의 가야문화이다. 이는 지역경제의 활성화는 단지 시설개발이나 국토개발을 통한 단기적 경제기반시설을 건설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지역문화의 개발과 활성화를 통한 지역발전 구상을 수립하고 추진할 때 가능한 것을 인지한 때문이다. 물론 성주에서도 유교문화나 불교문화가 존재하지만 타 지역과 차별되는 고유한 문화유산으로 내세우기에는 빈약한 실정이다. 또 星州는 문화재가 곳곳에 산재해 있으나 네트워크화 되어 있지 않고 주변이 정비되지 않아 역사·문화경관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는 등 우수한 문화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이에 군은 星州만의 상품으로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우리의 독특한 문화인 ‘태실문화’에 눈을 돌렸으나 태실 하나만으로 관광자원화 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동부권의 문화를 아우르는 생활사(生活死) 문화를 탄생시켰다. ‘생(生)’은 탄생을 의미하는 태실, ‘활(活)’은 활동·살다의 의미로 한개마을1), ‘사(死)’는 죽음의 의미로 성산동고분군2)을 일컬으며, 동부권의 이 3개 문화를 연결하면 탄생에서 삶·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일생에 대한 재 과정이 모두 다 이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전국 최초 재현한 ‘태 봉안의식’ 그렇다면 郡은 생활사 문화를 대표하는 태(胎) 문화를 알리기 위해 어떤 행보를 보이고 있나? 올해 참외축제에는 전국 최초, 최고의 태실 봉안의식의 문화행사를 재현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기존에 행해졌던 전통문화의 재연행사와는 많은 차별성과 독특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태(胎) 봉안의식’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에 있는 사적 제444호인 세종대왕자 태실의 장태의식을 전국에서 최초로 재현한 것으로, 지난 4월 23일 서울 경복궁에서 태 봉출의식을 재현해 주목을 끌었고 서울에서 출발한 태 항아리가 성주에 도착한 28일 오후 축제 현장에서 태 봉안 행차 및 영접·봉안의식을 갖고 축하연을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세종대왕자 태실의 봉안의식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 특히 邑에서의 안태사 행렬은 태항아리, 대고, 안태사·경상도관찰사·성주목사가 탄 가마를 호위하는 마상장군과 무사 등 3백여명으로 구성되어 웅장한 행렬로 관람객 및 주민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이색 볼거리 제공으로 군의 이미지를 향상시켰다. 또한 봉안 축하연으로 마련된 ‘태 이미지극’은 아직 시연 단계에 불과하나 웅장하면서도 질적 수준이 높았으며, 지역주민에게 있어 지역의 문화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게 했다. 아울러 아이들에게 있어서도 교육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앞으로 완성도를 높여 브랜드화 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郡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다른 여러 전통문화는 재현을 해 왔지만 태실의 봉안의식 재현은 우리 성주가 최초로 개최함으로써 조선시대 장태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재고시키는 촉매재가 됐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왕실의 독특한 장태의식을 재연함으로써 ‘길지의 고장’ 성주의 역사성과 생명문화를 대외적으로 알림은 물론 우리 전통 정신과 문화적 우수성을 느끼고 학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제 첫발을 내디딘 행사였기에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 있다. 봉안의식이 지역민의 자부심을 높이고 외지인에게 좋은 역사교육의 장이 될 수 있었으나 봉안의식만으로 그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일반 관객이 쉽게 다가서는 방법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조선의 명군인 세종대왕의 왕자태실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왕실의 번성 뿐만이 아니라 성주가 빼어난 산수와 기개를 갖추고 있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문화전통을 표현하여 성주의 문화정체성을 확보함은 물론 새로운 볼거리와 명소를 제공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흥미를 가지고 우리 지역을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하겠다. 郡, 태실 관광자원화에 나선다 박재범 郡 문화체육정보과 관광문화재담당은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3천여만원을 투입, 지난 8월 경운대학교에 ‘세종대왕자태실 생명문화공원 조성 기본계획수립을 위한 용역’을 발주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금년 말까지 용역 결과가 나오면 이에 따라 중앙부처의 검토 승인을 거쳐 연차적으로 개발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태실은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전제한 후 태실과 인접한 선석사는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전통사찰이며, 특히 조선초기 이후 태실 수호사찰로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선석사 대웅전과 선석사 괘불탱은 문화재로 지정 보호 관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태(胎)는 생명의 시원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세종대왕자태실 주변의 한개마을과 성산고분군을 연계한 생활사(生活死) 문화유적은 성주군 문화유적의 대표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태실의 현대적 의미로서 생명존중 사상과 출산 장려정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세종대왕자태실의 역사·문화적 가치 또한 세종대왕에서 단종까지 이어진 역사적 사건과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 태실과 선석사의 문화적 가치와 상징성의 현대적 의의를 고려한 생명문화공원 조성 등 문화관광자원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것. 따라서 생명문화공원 조성과 관련, 문화재적 의미와 상징성, 주변 문화유적과의 상관관계 등을 고려한 종합관광 개발을 위해 전문 연구진의 다양한 의견과 관련 전문가의 참여와 자문 등을 거쳐 단계별 추진전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기획취재3팀 ----------------------------------- 1)한개마을 성산이씨(星山李氏) 집성촌인 한개마을은 지금부터 5백여년 전 시조(始祖)로부터 15세손(世孫)이며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낸 이우(李友)가 정착하여 터를 잡은 후 이어져 오고 있는 마을로 한개라는 지명은 크다는 뜻의 ‘한’과 나루라는 의미의 ‘개’가 합쳐진 말로서 예전에 이 마을에 있었던 나루이름이 한개 나루였다는데서 유래했다. 한개마을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호위 무관이던 훈련원(訓鍊院) 주부 이석문이 터를 잡은 곳으로, 사도세자 참사후(參死後)가 영조 50년(1774년) 세자를 사모(思募)해 사립문을 북쪽으로 내고 평생을 은거한 충절(忠節)이 깃든 북비고택(北扉古宅)을 위시한 여러 채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2)성주 성산동 고분군(사적 제86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위치: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산 61번지 일원 규모: 129기 시대: 가야시대 성산(해발 389.2m)의 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무덤들이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는 성주성산동고분군은 가야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으로 현재까지 129기가 지정되어 정비 및 복원을 하고 있다.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1·2·6호분 및 ‘대분(大墳)’·‘팔도분(八桃墳)’이 발굴조사 된 바 있으나 조사의 경위나 결과에 대한 보고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1986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승왜마을 남쪽 능선에 분포하는 대형 봉토분 5기가 발굴 조사됐다. 지금까지 조사되어 밝혀진 무덤의 내부구조를 보면 매장주체부인 석실(石室)의 구조가 할석으로 축조한 할석식(割石式)과 대형판석을 주로 사용한 판석식(板石式)의 수혈식석실분(竪穴式石室墳)으로 되어 있다. 고분의 묘장(墓葬)형태는 1봉토 내에 2인 이상을 매장한 순장(殉葬)에 의한 다장묘(多葬墓)로서 별도의 순장곽(殉葬槨)을 설치하거나 부곽(副槨)의 한구석에 순장한 형태이며, 주실(主室)인 석실에는 크기에 비해 유물이 빈약하고 부곽에는 넘칠 정도로 많은 유물을 부장하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발굴조사에서 환두대도(環頭大刀), 금제이식(金製耳飾), 은제과대(銀製帶), 관식(冠飾) 등의 유물이 출토됐으며, 1986년 발굴조사에서 대호(大壺)를 비롯한 유개장경호(有蓋長頸壺), 단경호(短頸壺), 유개고배(有蓋高杯) 등 토기류와 은제행엽(銀製杏葉), 재갈, 교구 등의 마구류(馬具類)를 비롯한 2천72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최종편집:2025-05-16 오후 01: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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