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소멸 위기, 무엇이 문제인가 유구한 세월을 간직한 성주의 역사가 후대에 전달되지 못하고 잊혀져 가는 풍전등화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성산가야의 옛 도읍지로 찬란했던 가야문화의 맥이 면면히 흐르는 유서 깊은 고장 星州. 예향이자 백두대간의 끝자락이 감도는 반도의 길지인 성주 역사의 출발지는 바로 마을이다. 이 마을의 역사가 후대에까지 전해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기록’이 필요하다. 역사는 기록에 의해 정리돼 후대에 자료로 활용되고 있기에, 기록역사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다. 성주군 마을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한 최근 기록물은 1996년 郡에서 군지편찬위원회를 구성해 발간한 ‘성주군지’와 1998년 성주문화원에서 펴낸 ‘성주마을지’가 있지만,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공식자료로 활용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기록물과 함께 특히 젊은 세대에서 손쉽게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창구가 바로 인터넷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주군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마을역사 자료지만, 내용이 빈약함은 차치하고라도 오류가 상당해 문제다. 이 같은 역사 기록의 대표적인 오류사례는 다음과 같다. 경산리 자연부락, 史골 社골? 성주읍 경산리의 자연부락인 ‘사골마을’의 명칭유래는 두 가지 설로 나뉘는데, 이에 따라 사골(史洞)이 되기도 하고 사골(社洞)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성주군지에서는 사골(史洞)이라 표기하고, 성주마을지에서는 사골(社洞)이라고 엇갈린 표기를 사용해 혼란을 주고 있다. 군지에서는 사골(史洞)을 1408년(조선 태조 16년) 4대사고의 하나인 성주사고(星州史庫)가 설치됐던 곳이라 해(임진왜란 후 태백산사고로 옮김) 이 곳을 사동이라 했다는 데에 동조, ‘…견해가 보다 타당하게 여겨진다’(p.674)고 명기하고 있다. 반면 마을지에서는 사골(社洞)을 ‘주요읍에 사(社) 직(稷)의 신단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고, 이를 관장하는 사직서를 이 곳에 두었으므로 삿골(사직동: 社洞)이라 한다’는 유래를 따르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은 고려 이전에 큰 마을로 자리했고, 조선조 세종21년(1439년) 예산동의 새례골에 설치했던 성주사고(星州史庫)로 비유하는 일부의 지명 관련은 적절치 못하다’(p.21)고 상반된 의견을 내놓고 있다. 역사 기록물 재정비가 시급한 대목이다. 광영 주인공, 이원일 ∼만 ∼변? 선남면 도성리 광영 마을 유래의 주인공이 한 사람이 아니다? 군지에서는 ‘1560년 李元逸(이원일)이라는 선비가 마을에 입향하여 광령이라 칭하였으며∼’(p.717), ‘광영은 ∼ 약 420년 전에 李元逸(이원일) 선비가 임진왜란 때에 못안에서 피난하였다 하여 호인 광령당(廣寧堂)을 따서…’(p.718)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성주군 선남면 홈페이지에서는 같은 내용을 한글로 풀이하며 ‘1560년 이원만이라는 선비가 마을에 입향하여 광령이라 칭하였으며’, ‘광영은 ∼ 약 420년 전에 이원변 선비가 임진왜란 때에 못안에서 피난하였다 하여 호인 광령당(廣寧堂)을 따서…’라고 오표기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군지와 마을지 등 기록물의 대다수가 한자에 지나치게 의존해 있다는 것. 지금의 한글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익숙치 않기에 한글로 옮기며 오표기하는 사례가 잦아 한자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불충분한 자료…역사 신뢰도 낮아 역사지 전반에 걸친 일련의 오류도 문제지만 근본적인 한계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인한다. 요즘 세대가 자신이 나고 자라는 마을의 유래와 역사를 알려면, 현재의 역사서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일각에서는 10여년 전 郡에서 마을유래를 조사할 때 인력 등의 여건상 일부 혹은 특정인에게만 조사를 한정했기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군지나 마을지에서는 우리네 역사의 출발지라 볼 수 있는 자연부락에 대해 유래는 물론이고 그 구분조차 모호한 실정이다. 그 예로 선남면 도성리의 경우 자연부락은 광영·마안골·중리·못둑·배나무정 마을의 5개로 나눠져 있다. 하지만 군지나 마을지 모두 자연부락을 4개로 기록하고 있고, 도성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배나무정 마을은 배제했다. 다만 군지에서는 배나무정이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지만 문화유적으로 구분해 인근 유현의 놀이터로 활용하고 있다고 오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젊은 세대는 물론 면(面) 행정공무원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선남면 동암리의 경우 군지에서는 동촌과 봉암·서촌의 3개 부락으로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제시대에는 자연부락으로 봉암을 기점으로 해서 동편과 서편을 나눈 동촌과 서촌으로 구분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동촌과 서촌 2개 부락만이 존재한다. 이처럼 마을의 구분조차 모호한 실정에서 그 유래에 대한 신뢰도는 극히 낮을 수 밖에 없다. 올바른 역사 정립, 지금 나서야… 현 시점에서는 역사서는 물론 인터넷의 무수한 정보 어디서도 우리 마을의 정확한 유래를 찾기 힘든 실정이다. 문제는 올바른 역사를 찾아내고 기록하는 노력이 늦어지는 만큼 왜곡된 역사에 한걸음 가까워진다는 것으로, 과거의 역사를 소상히 기억하는 고령의 어르신 세대가 지나갈수록 역사의 맥은 끊어져 우리 아이들이 부모와 조상의 터전인 고향마을에서 멀어진다. 도시화와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급속하게 소멸되고 있는 향토문화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역사서 정비를 요구하는 이유다.
최종편집:2025-05-16 오후 01: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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