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내, 당신 읽어보오.
추석이 다가오니 자꾸만 옛날이 회상되는 구료. 지난날 몸져누워 계시던 어머니를, 오로지 어머니의 수발과 병간호에만 온갖 정성을 다 바치던 당신의 모습에서 나의 어머니가 당신의 어머니이고, 우리 아이들의 어머니가 당신이라고, 그리고 새삼스럽게도 당신은 어머니답다고, 또 그 여성은 아름답다고 느꼈다오.
당신이 팔 걷고 어머니를 안아 일으키고, 물 떠다 어머니 입술 적시고, 물수건으로 얼굴이며 손이며 팔을 깨끗이 해드리고, 안아 눕히고, 깔깔한 새 침구로 갈아 드리고….
나는 당신이 무척 갸륵하고 소소(昭昭)한 가인(佳人)이며 효성스런 여인이라고 느꼈다오. 여인이란, 그리고 어머니란 모두 그러한가 보오!
당신의 시어머니 즉 나의 어머니가 한참 활동하실 그 즈음, 내가 어떻게 한번 어머니께 조력이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당신에게 “얘야! 애비는 시키지 마라. 힘들다” 하시었다고, 그리고 내가 입이 짧아 무엇을 잘 먹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맛있는 요리를 해서 내 앞에 상을 갖다 놓으시고선, 어머니께선 내심 자신이 자리를 비켜주면 아들인 내가 혹시 좀 더 많이 먹
어 주려니 하시는 애타는 마음으로 저만치에서 숨어서 날 보시었다고 내게 귀띔해준 당신이 지금 바로 그 어머니 그대로라오.
그 어머니의 그 심성이 바로 지금의 당신 심성이라오. 세상의 어머니란 모두 그러한가 보오.
몇 일전 추석벌초 겸 성묘하러 내려가 어머니 묘소에서 주절주절 말씀을 드렸다오.
“어머니의 며느리가 어느 사이에 어머니를 빼어 닮은 우리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버렸어요. 새벽같이 일어나 중년이 다 된 아이들의 아침식사를 챙겨주고, 아침 청소하고, 빨래 걷어 개키어 애들 방이랑 내방에 차곡차곡 정리하여 제자리 갖다두고, 물표·세금표·영수증 등 서류들 정리하고 내 점심 준비하여 차려놓고선 곧장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장봐서 그 무거운 것들을 팔이 빠질 만큼 들고 와서 “사과가 싱싱한데 하나 갈아 드릴까요?”라고 물어보고 금방 시원한 과일 주스 한 컵을 만들어 건네고 나서, 이런저런 남은 음식을 대접에 모아 비빔밥 해서 적당히 자신의 요기로 때웁디다.
꼭 어머니 그대로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머니께서 생전에 가르쳐 주셨던 조리법이라든가 손자에게 해주셨던 말들을 간간히 곧잘 흉내를 내며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으며 저에게 이야기 해주곤 합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한 없이 그립다 합니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은 다 그러합니까?
옛날에 제가 새벽에 나가고 자정이 넘어 들어오던 직장 생활 당시에는 세상 어머니들의 심성이 어떠하였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좀 알 것 같습니다.
이번 추석 차례도 그 사람은 어머니께서 생전에 하시던 그대로 잘 할 겁니다. 모두들 저의 집에 와서 차례를 치루고 돌아가겠지요. 그 옛날에 어머니께서 하셨듯이 그 사람도 웃는 얼굴로 그 많은 일을 다 할 겁니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조금씩 챙겨서 돌아가는 가족들에게 골
고루 줄 겁니다.
어머니! 이번 추석에는 그 사람에게 뭘 좀 해 주고 싶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람의 그런 모습을 보니 더욱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나의 아내, 당신의 일상을 어머니에게 그렇게 좀 중얼거리고 나니 한결 기분이 좋아집디다. 세월 다 보내어 놓고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연유는, 이제 나도 백발이 되었으니 그동안 쑥스러워서 말 못했지만 더 늦기 전에 “당신이 좋소!” 라는 말도 해두고 싶었고 또 평소 표현이 둔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먹통이라고 당신이 혹 서운한 마음이라도 가질까봐 비로소 지금 속내를 보이는 것이니 내 마음을 만우일모(万牛一毛)라도 헤아려 달라는 뜻이오.
벌초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저녁이라 달이 밝았다오.
그래서 이백(李白)의 시(詩) 한 구절이 떠올랐소.
푸른 하늘에 달이 떠 있은 지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고.
이 몸 지금 술잔 멈추고서 한번 물어 보노니.
인간은 저 밝은 달로 올라가 그 달을 잡을 수 없는데도
달은 오히려 사람을 따라 다니고 있네.
[中略]
오늘의 사람은 옛적의 그 달을 보지 못 하였을진데
오늘의 달은 그 옛날의 그 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
옛 사람이나 오늘의 사람이나 모두 흐르는 물 같을 진데
그들도 다 같이 저 밝은 달을 보고 한마음으로 이와 같이 느꼈으리라.
젊은 시절, 고향에 내려가 대청에서 어머니와 당신, 우리 형제자매 모두가 밝은 달빛 아래서 왁자글 즐기며 행복했던 어머니 생전의 그 가절(佳節), 그 한가위!
그 때 어머니를 비추어 준 그 달은 이번에도 우리 모두를 그 시절처럼 밝게 비추어 주겠지요. 내년이면 우리 아이들, 며느리들, 손자와 손녀들, 한 가족이 모여 저 달빛 아래서 어머니 생전의 모습대로 당신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고 그것이 우리 아이들의 추억으로 남겠지요.
그래서 당신 안의 우리 가족은 늘 즐겁게 그리고 오래도록 이어가지 않겠소.
지금의 우리 아이들도 먼 훗날 ‘공간명월개여차(共看明月皆如此)’라고 하겠지요. 항상 은애(恩愛)하오. 총총난필
당신의 남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