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 나는 두 번에 걸쳐 마닐라로 출장 갈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 출장은 제11차 세계최고감사기구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것이고, 두 번째 출장은 효율성감사에 관한 세미나 참석이었다. 첫 번째 출장은 우리나라가 아세아지역 최고 감사기구회의의 의장국으로서 우리나라 감사원의 위상이 상당히 높아져 있을 때였다. 문제는 의장께서 계획에도 없었던 아세아 출신 대표들에게 오찬연을 베풀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지시에 당황스러웠지만 강행할 수밖에 없어 대회 조직위에 들러 아세아국 참석대표자 명단을 확인하니 어림잡아 30여명이 되는 것 같다. 우선 오찬을 베풀 장소를 물색하려고 S호텔로 뛰어갔다. 모든 식당들이 문이 잠겨져있고 12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는 것이다. 다급한 나머지 지배인을 찾았으나 11시 이후나 출근을 한다는 것이다. 외국손님을 초청장도 없이 초대하는 마당에 장소를 정하지 않을 수 없어 일단 S호텔로 장소를 무모(?)하게 정하고 국제회의장 세미나 장소를 찾아다니며 국제 의전관례를 무시하고 각국 대표들에게 12시 S호텔의 오찬연에 구두 초청을 하였다. 가까스로 초청을 끝낸 후 11시가 가까워 호텔로 줄달음쳐 뛰었다. 만약 장소 예약이 안 되면 큰일이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땀에 흠뻑 젖어 호텔연회장으로 들어가니 식당청소원이 청소를 하고 있었고 때마침 식당 지배인이 출근을 하고 있어 그를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30여명의 외국대표가 이용할만한 연회장이 있느냐고 허겁지겁 묻자 그 지배인은 국제 오찬연 행사가 어떻게 이렇게 조급하게 추진될 수 있는지 의아하게 나를 처다 보면서 약간 뜸을 들인 후 준비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 순간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미국문화에 길들여진 필리핀만 해도 예약문화가 발달돼 있어 국제 오찬이라면 적어도 며칠 전에 예약이 되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가까스로 장소를 마련한 후 30여명의 각국 대표가 오찬 장소로 몰려들었고 오찬연은 차질 없이 마칠 수 있었으나 정작 나는 이런 저런 심부름을 하다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 배를 쫄쫄 골아야 했다. 오찬이 끝난 후 각국 대표들을 버스에 승차시켜 각각 투숙호텔로 귀환시키는 도중 내 옆에 앉아 있던 남예멘의 대표는 오늘 점심 정말 잘 먹었다고 몇 번이나 감사를 하고는 자기도 우리나라에 와 봤다면서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을 아직도 존경하고 있다는 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모든 대표들을 호텔로 무사히 귀환시킨 후에야 비로소 나를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분명 이날 하루는 한국의 빨리 빨리 문화에 혼줄이 난 하루였다. 두 번째 마닐라 행은 1983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다. 출국 전 9월 28일경 죽마고우인 서석준 부총리도 대통령을 모시고 미얀마 랑궁으로 출국을 한다기에 동문들의 후원으로 같이 서소문에 있는 한식당에서 석별의 만찬을 하게 되었다. “다 같이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자” 하고 이별의 술잔을 기울이며 귀국 후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내가 먼저 마닐라 행 비행기를 탔다. 그 당시 마닐라는 민주화 데모가 일고 있었고 그해 8월 하순경 CAL기를 타고 귀국하던 젊은 야당지도자 아키노 상원의원이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어 민심이 흉흉할 때였다. 마닐라 공항에 마중 나온 필리핀 감사원 직원마저 만약 아키노가 CAL기가 아닌 KAL기를 타고 귀국했다면 암살을 모면했을 텐데 하고 아쉬워 할 정도였다. 마닐라 마캇티시에서는 매일 오후 시간을 정하여 민주화 데모가 일어나고 있어 마닐라 민심은 마로코스 대통령의 권위주의로부터 서서히 이완되고 있었던 것 같다. 효율성 감사 세미나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세미나 진행 사회는 알파벳순으로 하자는 제의에 따라 한국대표인 본인이 첫날 세미나 사회를 맡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영어실력도 그렇고 해서 사회자로서 나를 소개하면서 나는 영어는 서툴지만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하여 박수를 받긴 하였으나 그날은 분명 내 생애에 가장 긴 하루가 아니었던가하고 생각된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필리핀 대표를 대동하고 길 건너에 있는 살롱에 가서 맥주잔을 들이키면서 당시 프랭크 시나트라가 유행시켰던 My way를 감상하며 하루의 피로를 씻기도 했다. 그런데 10월 9일인가 이른 새벽 인도에서 온 씨크 라는 친구가 내 방문을 노크하면서 “미스터 장! 한국 어디선가 폭발사건이 일어났다”고 호들갑을 떤다. 주 필리핀 한국대사관에 수소문하여 사실을 확인한 결과 아웅산에서 폭파사건이 일어나 대통령은 이곳 마닐라로 향해 비행하고 있다고 했고 구체적인 인명사고 내용은 대사관측에서도 잘 모른다고 했다. 나는 우선 친구 서 부총리의 생사를 알려고 노력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서석준 부총리를 위시한 수많은 대표들이 사망했다는 비보를 서울 아내로부터 전해 듣고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 9월 28일 이별의 술을 나누면서 마닐라는 정국이 불안하니 나한테 몸조심하라고 특별히 당부하던 그 친구가 오히려 비명에 가다니…. 그날 이후 밤잠을 잘 수 없었다. 그 후 귀국하여 뜻있는 친구들과 함께 국립 현충원을 찾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세미나는 계속되었고 하루는 동료 한분의 구두 밑창이 떨어져 나갔다. 걷는 모습이 마치 오리걸음 같아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어차피 구도수선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마캇티 시장가로 나갔다. 때마침 뜨내기 구두수선공이 있어 요금을 흥정하고 구두를 맡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수선공이 헌 구두 신짝을 갖고 줄행랑을 치는 게 아닌가. 우리는 일제히 “도둑이야” 고함치며 그를 뒤쫓기 시작했고 가까스로 수선공을 붙잡아 구두를 되찾긴 했으나 가난한 필리핀 서민생활 속에서 지난 날 6.25전쟁 당시 우리들의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랐다. 하여튼 번갯불에 콩 복아 먹듯 외국손님을 초청한 오찬연이며 구두 뒤창 나간 헌 구두를 잃어버릴 뻔 했던 사건은 평생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최종편집:2025-05-16 오후 01: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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