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을 찾는 방문객이나 지인들은 우릴 보고 “천당에서 산다”면서 못내 부러워한다. 그럴 때면 ‘저들이 과연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마룻장 하나에도 나의 피와 땀이 응축(凝縮)되어 있음을 알까’ 하는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천당과 지옥은 외형적인 모습이나 형태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가짐에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사랑 마당 한쪽 공터와 동리 어귀의 채마밭에 가지, 오이, 상추 등을 심었다. 친지들이 오면 풋풋한 채소로 정을 표한다. 영농비가 채소 값의 몇 배가 넘는, 계산상으로는 희한한 농사지만 정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만족한다.
육체적 노동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로서는 집안일만으로도 감당하기가 벅차다. 특히 봄부터 초가을까지의 제초작업은 여간 고되지 않다. 뿌리까지 송두리째 뽑아버리면 나지 않을 것이란 나름대로의 상식으로 잡초를 뽑아보았지만 며칠만 지나면 그 자리에 새로운 잡초가 돋아나곤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잡초의 생명력에 경이와 감탄을 연발하면서도 오기가 발동하여 치열하고도 끈질기게 ‘잡초와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밥알 떨어져도 주워 먹을 수 있겠다’는 어느 방문객의 과장스러운 표현대로 쾌적하고 청결한 환경을 가꾸기 위해 나름대로 부단히 노력한 덕분에 청결은 유지하지만 대신 나의 두 팔은 늘 통증을 달고 다니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간단하게 제초제만 뿌리면 되지’ 라며 미련한 나의 열성을 탓하는 사람도 있지만 손자, 손녀들이 오면 맨발로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그럴 수가 없다.
아내는, 잠자리 이불 개키는 것에도 인색하던 사람이 고된 일에 골몰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면서도 대단하다는 말로 감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내는 모른다. 내가 그러는 것이 다른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즐겁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그만큼 자신의 삶이 충만해진다’는 삶의 지혜를 뒤늦게 깨달은 덕에 하루하루를 더 충만하게 채우려 애쓴다는 것을.
우리 집 가학(家學)의 산실인 작은 사랑채에 걸려 있던 ‘독서종자실(讀書種子室)’ 현판을 아래채로 옮겨 달고 그곳을 서실로 꾸몄다. 만 권 서적은 못되지만 몇 천 권의 장서(藏書)는 된다. 책은 세상보다 훌륭한 세상이며 그 속에 사랑, 휴식, 건강, 관용 등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다. 종종 책과 대화하다가 잠에 빠지곤 한다. 책이 있기에 외롭지 않고 고독하지도 않다.
이따금 정다운 벗들이 찾아온다. 요사이는 저마다 바쁜 세상이라 유유하게 벗들과 자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시간에 쫓기고 생활에 쫓기기도 하겠지만 폐 끼치는 것을 지나치게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두들 오면 떠나기 바쁘다. 마음 같아선 며칠 함께 세월을 낚아 보고 싶지만, 아쉬운 정만 남기고 떠나간다.
이곳은 대구에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여서 벗들의 초청이나 모임이 있는 날은 기사역할을 맡고 있는 아내와 함께 풍경에 취하고 길 맛에 취하기 위해 차를 몰고 대구로 간다.
귀향한 지 햇수로 4년이다. 종택 보수 및 정원조성, 정헌공(定憲公) 신도비(神道碑) 이건(移建), 돈재공(遯齋公) 신도비(神道碑) 비각(碑閣) 보수, 진입로 복개, 만귀정(晩歸亭) 보수 정화 등 많은 일들을 추진하면서 혼자 외롭게 뛰어 다니느라 몸도 마음도 고달팠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순조롭고 계획대로 추진되어 보람과 기쁨에 취하기도 했다.
생업따라 타관에서 떠돌던 지난날에 두 번이나 도둑을 맞아 어필첩(御筆帖)과 서책, 그림, 글씨 등 소중한 유물을 도난 당한 적이 있다. 그랬기에 귀향을 결정하면서도 조상님의 유품을 모두 모실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 정헌공의 영정만이라도 모시고 싶었으나, 일시적인 나의 욕심이 자칫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될까 두려워 모든 유품을 아이들 집에 분산 보관했다.
2001년 6월 17일 개관한 국립제주박물관에 우리가 기탁했던 497점의 유물이 훌륭하고도 쾌적하게 꾸며진 독립 전시실에 전시된 광경을 보고, 기쁨과 감사함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주말이나 행사 때는 아이들 내외와 손자 손녀들이 모인다. 저마다 맡은 책임이 있고 바쁜 세상이라 다섯 집이 함께 자리를 같이 하는 경우는 일 년에 너댓 번 정도이다. 가화는 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던가. 나는 이 말을 평생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자식들이 가족 간에 서로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니 고맙다. 형제간 우애 있게 지내란 말이 우리 내외의 간곡한 바람이요 부탁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조상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종택을 가꾸고 못다한 위선사업(爲先事業)을 추진하는데 소요되는 경비가 만만치 않다. 내가 감당하기에 벅차고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조상을 위한 일은 결코 금전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정성으로 할 수 있다는 지혜도 깨우쳤다. 우리 내외는 조상 일에 소요되는 경비는 돈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준 은혜의 보답으로 생각하자며 오히려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귀향하여 첫 번째 가족모임에서 나의 임종은 사랑방 아랫목에서 맞도록 해주고 염습 후 시신은 자혜당으로 옮겨달라는 부탁도 했다. 사랑방 아랫목은 선대의 할아버지께서 임종을 맞이한 곳이며, 자혜당은 내가 생가의 어머님과 아내를 위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편리한 세상에 자식들 고생 시키려고 작정했냐면서 아내는 불만을 표시했지만 아내의 참뜻을 알고 있기에 웃고 말았다.
나의 귀향은 일종의 죽음 준비과정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몫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결단이요 실행의지다.
우리 집의 청태(靑苔) 낀 기왓장과 풍우를 맞아 부식된 기둥, 두 세기를 넘게 버텨 온 투박한 마룻장과 풍성한 자연 속에서 나는 섭리와 순리와 겸손을 배우고, 인간사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통해 유전(流轉)하는 참뜻을 깨닫는다. 그래서 깨끗하고 곱게 늙어 떳떳하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귀향의 다짐을 저버리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 2001. 10. 공수래공수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