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31일 향년 96세로 김동진 선생이 돌아가셨다. 우리나라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분이요 새벽 동쪽 하늘의 계명성처럼 빛나던 분이 그 빛을 멈춘 것이다.
방송은 부음을 전했으며 신문은 선생의 발자취와 온 생애의 열정을 음악으로 불사른 선생을 박스기사로 다루어 예우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숭실전문학교 시절부터 당대의 유명 시인들의 시집을 지니고 다니며 애독했으므로 그 많은 가곡을 작곡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한 줄의 시문을 보고도 떠오르는 악상을 명곡으로 승화시킨 선생이야말로 원로 음악인, 아니 거장이라 이름하여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공산치하가 싫어 6·25 전쟁 중에 남하하다 헌병의 검문을 받았다. 황망 중에 신분을 확인할 아무것도 없는 어려움에 직면하자 선생이 “가곡 가고파의 작곡자”라 하여 무사히 위기를 넘긴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 일화는 잡다한 세상사에 묻히고 말았지만 선생의 음악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선생의 음악 열정 앞에는 이른바 장르라는 의미는 없었다. 피아노, 클라리넷 연주는 물론 일본 니혼고등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지휘자로 시작한 음악생애는 약관에 국민가곡 ‘가고파’를 작곡했으며 예술가요, 교성곡, 교향곡에다 영화음악과 군가 등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춘향전과 심청전의 판소리를 오페라와 접목시키는 신창악에도 애정을 쏟은 큰 음악인생을 사셨다.
선생의 부음을 처음 듣고 비통하기보다는 때 아닌 감흥에 젖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한국 음악의 태두이신 선생이 나의 어쭙잖은 가사에 곡을 쓰신 분이기 때문이었다. 한 예술 작품은 명작이든 태작이든 장인(匠人)의 손을 거쳐서 탄생한다. 나 같은 무명의 작사자에게 고명하신 선생이 곡을 붙여 한 작품이 됐다는 것은 작사자로서는 대단히 큰 영광일 수밖에 없다. 마치 평민이 귀족과 혼인하여 신분이 상승하는 것이거나, 반상의 계층이 엄격하던 조선시대에서 노비가 양반과 혼인하면 그 자식이 면천(免賤)이 된다는 이치와 같다고 하면 지나친 자기 합리화가 되는 것일까?
어느날 지하철에서 경희대학교로 학생들 심사하러 가신다는 선생님을 뵈었지요. 팔순의 고령이신데 택시라도 이용하실 일이지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지하철을 이용하신단 말인가도 했고, 학교가 초빙하려면 교통편도 제공하는 것이 원로교수에 대한 예우가 아닌가도 했습니다.
또 어느날은 대중목욕탕에서도 만났지요. 종로 구민의 노래 작사한 사람이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선생님은 미리 생각이나 하고 계셨던 듯 “아, 그래요? 그 노래는 구민들이 자꾸 부르고 또 불러야 된다”고 하시기도 하여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생님의 음악 사랑을 느끼게 했습니다.
80 노구는 그만두고라도 땟물이 여울지는 바닥에 여느 목욕객처럼 앉아 때밀이도 없이 때를 미시는 폼이 영락없는 우리들의 다정한 이웃 어른이었습니다. 무엄하게도 ‘목욕탕의 옷을 벗은 다 같은…’의 유행가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장삼이사의 소시민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소박하게 이웃들과 맨살을 스치며 대중탕을 이용하시는 강건하심과 참으로 소탈하심에 나는 새삼 놀라고 말았습니다. 작게라도 유명세를 타거나 지명도가 있을수록 아무데서나 만나기가 쉽지 않음이 우리들의 세정임을 미루어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처음으로 뵙게 된 시상식날도 그랬습니다. 노대가의 지명도만큼이나 큰 중압감에 우선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부끄럽게도 기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처음 대하는 누구에게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그런 인품이셨습니다.
나의 노랫말에 곡을 써주신 김동진 선생님, 무명이지만 아무래도 조문을 해야 할 일이기에 장례장을 찾았습니다. 그 넓은 장례장 한 층이 모두 조문객과 조화로 가득하여 내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나 같은 무명인은 그 번잡함을 덜어드리는 것이 오히려 예를 다하는 것 같아 묵도와 배례를 올리고 물러나왔습니다. 선생님, 참 죄송합니다.
님은 가셨어도 님의 예술혼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작품과 그 많은 후학들이 있는 한, 음악으로 온 생애를 사시며 쌓은 위업의 예술혼은 길이 빛날 것입니다.
김동진 선생님! 가시는 길 평안하옵시고 그래도 못다 하신 음악 열정이 남으셨다면 끝없이 사르시며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옵소서. 삼가 영전에 이 소품문(小品文)을 올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