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과 관련된 야담 가운데는 주모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그 가운데는 용꿈을 꾸었다는 손님이 주모와 정을 맺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향촌의 주막은 술맛이 좋고 안주가 맛깔스럽고 정갈하다고 하여 술꾼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러나 사실은 술맛이나 안주맛보다 주모인 해심( 海心)의 미모 때문에 아침부터 밤까지 모여들었다. 해심은 임자 없는 청상과부인 데다 몸이 날씬하고 인물이 절색이었다. 그래서 장이라도 서는 날에는 해심이의 조그마한 주막집 안은 손님들이 콩나물시루처럼 차서 초가집 지붕이 날아가고 벽이 트일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장안의 한량이라고 자처하는 오입쟁이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해심이를 안아 볼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정도라면 해심이와 가까이 지낸 술꾼도 더러 있으련만 실제로 해심이와 정을 통했다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은 없었다. 이들 술꾼 중에 정 선달이란 자가 있었다. 꾀가 많을 뿐만 아니라 오입질을 하는 데 있어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였다. 정 선달도 해심이의 술집을 자주 찾았다. 술청에 와서는 언제나 한구석에 점잖게 앉아 말없이 술만 마시는 선달에게 해심이는 호감을 표시하였다. 정 선달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이란 말이 있지만 세상에 안 될 일이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하면서 해심이에게 접근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정 선달은 이른 저녁에 해심이의 술청을 찾았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은 정 선달은 마침 해심이와 마주 앉게 되었다.
“언제까지 주모 노릇만 할 작정인가?”
정 선달이 측은해 하면서 물었다. 해심이는 눈을 아래로 깔며 한숨을 내쉬 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죽지 못해 살지요.”
아마도 또 그 신세 한탄이 나올 모양이었다.
“자식도 없이 혼자 살면, 살아서는 그런대로 산다지만 죽어선 제사도 못 받 아 먹는 떠돌이 귀신이 될 셈인가?”
정 선달은 더욱 동정하는 빛으로 말하며 해심의 기색을 살폈다.
“글쎄 말예요……. 어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나 하나 얻으면 봉제사(奉祭
祀)라도 시키련만…….”
해심이의 말에 정 선달은 얼른 맞장구를 쳤다.
“야, 그 좋은 인물에 솜씨도 엽엽하겠다, 자네를 탐내는 사내들이 오죽이나 많겠나?”
해심이는 아는 듯 모르는 듯 한숨을 내쉬며“사내면 다 사낸가요? 자식을 받으려면 씨가 좋아야지요”하며 행주치마로 코밑을 닦았다.
정 선달은 그 말에 속으로 무릎을 쳤다. 좋은 수가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 다. 정 선달은 갑자기 덥다면서 두루마기를 벗어 던졌다. 해심이가 자리를 뜨자 정 선달은 두루마기를 주막에 벗어둔 채 저고리 바람으로 주막에서 나왔다. 두루마기 입기를 잊어버린 체한 것이다.
해심은 정 선달이 두고 간 두루 마기를 둘 데가 없어 벽 한구석에 걸어 두었으나 보기가 싫어 그가 빨리 와서 가져가기를 기다렸으나 정 선달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한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새벽에 정 선달이 해심의 주막에 나타나 아침잠을 자고 있는 해심을 깨우면서 수선을 피웠다. 해심은 억지로 일어나 그의 두루마기를 내어 주려 하였다. 그런데 정 선달이 갑자기 목구멍이 막혔는지 아니면 바람을 맞아 벙어리가 되었는지 말을 못하고 손짓 발짓만 하는 것이었다. 해심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까닭을 물었으나, 정 선달은 손으로 입을 막고 어금니를 꽉 물면서 빨리 두루마기를 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해심이는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겨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정 선달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틀어막으면서 몇 마디 토막말을 뱉어냈다.
“어젯밤에 ……용꿈, ……마누라가 처갓집에 ……나 마누라에게 빨리 ……
가야 ……해.”
해심이는 금방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반벙어리의 말 처럼 말허리가 잘려 있지만, 어젯밤에 용꿈을 꾸었기 때문에 처가에 가 있는
아내에게 빨리 가서 볼일을 보아야겠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고로 상서로운 꿈을 발설하면 꿈의 효험이 없어진다고 하였으므로 용꿈을 꾼 정 선달이 이를 발설할 수가 없어 벙어리 흉내를 내게 된 이유를 알아차린 것이다.
해심이는 가슴이 달아올랐다. 용꿈은 인재를 얻을 태몽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두루마기를 입고 허둥대며 나가는 정 선달을 해심이는 체면 불구하고 붙잡았다. 그리고 심부름 하는 아이에게 오늘은 손 님을 받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정 선달은 시간이 급한 사람을 왜 이렇게 붙잡느냐는 것처럼 팔짓으로 소매를 뿌리치고 다시 걸어 나갔다. 해심이는 나가는 정 선달의 소매를 다시 잡고는“내 배면 어떠리요, 뉘 배에서 났건 다 선달님 자손 아니오?”하면서 방으로 잡아끌었다. 정 선달은 못 이기는 체하고 따라 들어갔다. 그 후에 해심은 그때 생긴 아이가 재상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늙어 갔다고 한다.〔김영진,《조선시대의 이야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