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성주신문을 보았다. 이 신문에 백년설 선생 흉상과 노래비 제막식이 성주고등학교에서 개최되는 것을 극렬 반대한 일부 농민회 사람과 교육노조단체가 있었다는 기사를 보게 됐다.
백년설 선생하면 누구인가? 옛날말로 유행가 한 곡조 불렀다는 사람이면 선생의 노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일본제국주의의 군대를 위한 노래를 불렀다 하더라도 남모르게 우리 조선인의 심금을 울린 노래도 많이 불렀다. 잘못되었다는 노래만 갖고 친일파니 뭐니 하고 매도한다면 현 대한민국의 노인들 또는 그분들이 윗대 어른들에서 친일파가 아닌 분들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일본당국이 강요한 창씨개명에 모두가 따랐기 때문이다. 김씨 성이면 가네다니 가네모도니 하였고, 이씨 성이면 마쯔모도, 마쯔오카라고 일본식 성으로 바꾸었다.
우리의 선대에서는 자기의 성을 바꾼다는 것은 곧 조상을 바꾼다는 것으로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창씨는 바로 불효막심한 짓이었다. 그런데도 왜 창씨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면 바로 일제의 강요 때문이다. 그들의 강요에 따르지 않으면 조선에서 살 수 없게끔 핍박이 심하였기 때문에 피치 못하게 창씨개명을 한 것이다.
백년설 선생도 이런 경우와 같다. 그렇잖아도 지난 정권에서 과거사위원회라는 집단을 만들어 친일파 명단도 작성하고 하였는데 그들 단체와 호응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제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한 명도 볼 수 없었고 더욱이 자기 아버지 자기 할아버지의 창씨개명이나 일제에 곡식을 바치던 공출, 일제에 협력한 징용과 징병문제는 언급이 없었다. 당시 유명인의 일제협력만 가지고 별별 소리로 따진다는 것은 형평성이 없는 과거사위원회의 행태였던 것이다. 독립운동 하는 애국지사를 총칼로 죽이고 고문을 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면 친일파란 너울을 씌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느 농민단체의 회장 말이 신문에 나온 것도 보았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꿋꿋이 자기 조상의 얼굴인 성씨를 일제 강요에도 그대로 지켰는지 묻고 싶다. 오늘날 우리 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로 그같이 자기 윗대의 조상들 경우는 안돌아보고 새삼 유명인의 과거사나 뒤적여 매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특히 진보성향이라 하는 집단들이 더욱 심하다.
성주라 하면 유서가 깊은 곳이다. 역대 유명인도 많이 나왔다. 이런 고장에 진보라는 이름을 띄고 선대를 모욕하고 지난날 정권처럼 친북적이고 좌파적인 색채에서 이데올로기적 시각을 갖고 향토의 각계인물들을 매도하는 것은 고장의 명성을 오히려 먹칠하는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농민단체라면 농민단체로의 그런 과거사 문제 같은 것에 시비 걸고 할 필요는 정녕 없는 것이다. 그런 문제의 판단은 일반적인 군민이 하는 것이고 그 학교의 동창들이 하는 것이다.
성주를 본관으로 삼은 이씨가 참 많다. 성산(성주의 옛 지명)이씨, 벽진이씨, 성주이씨, 광평이씨 경산이씨, 가리이씨 여섯 성씨가 성주지역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이 여섯 성씨의 가문에서 과거나 지금이나 큰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필자는 밀양사람이다. 본인의 고장 밀양에도 가요계의 거인 박시춘 선생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박시춘 선생은 작곡가로 유명하였다.
물론 일제시대에도 작곡활동을 하였고 친일파란 소리를 듣는 가수도 배출하였다. 그러나 밀양지역 사람들은 흉상건립에 반대하지 않았다. 백년설 선생도 잘 아는 작곡가였던 것이다.
백년설 선생의 노래비가 세워짐으로 하여 성주지역에 관광객이 몰려올지도 모르는데 이번 흉상제막 반대가 있었다는 것은 실로 유감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