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또 한해가 저물고 있다. 6자회담 4강구도속에 우리의 내일을 우리가 주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처지는 100년전과 대동소이한 실정이다. 유난히도 정치 경제 기후 생활 등의 여건이 우리를 괴롭혔던 한해였다. 이 고뇌를 어루만져 덮어 주려는 듯이 밖에는 함박꽃 같은 눈이 내리고 있다. 나는 동심의 낭만이 일고 있는데 전라도 강원도 사람들은 눈 피해를 걱정들 하고 있다는 보도가 마음에 걸린다.
나와 나의 고향공동체 星州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나’라는 존재인식에서 출발한다. 내가 있음으로서 부모, 형제, 가정, 고향, 모교, 직장, 나라와 겨레가 상관관계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소중한 중심이 나이지만 그 나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외연(外延)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제대로 정체성을 발휘할 수 가 없다. 오히려 그 외연의 정황이 좋으면 부실한 나도 더 큰 기운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외연과의 상관관계에 많은 관심을 쏟고 가꾸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생활공동체라는 삶의 틀인 것이다.
나는 성주 법산 최씨 종가 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지사국민학교, 성주 중학 농고를 다니면서 성주의 농업사회, 유교문화 풍토 속에서 잔뼈가 굵었다. 대구사범을 거쳐 서울로 대학진학한 후 고향, 모교와는 거리가 먼 객지 서울에서 60여년을 살다보니 늘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그런 그리운 고향이 늘 내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의 삶의 기쁨으로 남는다. 그래서인지 서울동창회를 창립하고 내가 문교부에 근무하는 덕분에 모교에 관계되는 일을 열심히 돕게 되었는지 모른다.
대를 이어 열심히 살다보면 훌륭한 업적을 남긴 조상의 은덕도 입게되고 고향을 빛낸 선현의 음덕으로 오늘을 사는 후배들이 자부심으로 역사를 갱신해가기도 한다. 우리 성주는 성주를 빛낸 훌륭한 선배도 많고 그 후광을 입은 후배들이 오늘도 샛별처럼 자꾸만 솟아나고 있음은 기쁘고 자랑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삶의 관계는 거의 운명적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의 소중함과 똑 같이 남과의 관계를 소주히 가꾸어가야 할 도리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성주의 빛나는 전통 인맥 이어가기
몇 일전 성주고등학교 이 영성 교장입니다 하고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상기된 목소리로 두 학생이 2007년도 서울대 입시에 합격했다고 외치며 모교의 기쁜 소식을 알려준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며칠 후 성주 신문을 받아보니 ‘지역 명문고 탄생’이라는 타이틀에 성주고 2명(오인수, 김두권)과 성주여고(김은진, 우혜주 양)2명의 사진과 함께 성주교육 발전위원회의 다년간의 노력이 결실되고 있다고 크게 보도된 고향 소식을 전한다. 특히, 출향인으로 서는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다. 고향 후배들이 열악한 여건속에서도 부모님들의 정성과 지역유지 및 동문들의 뒷받침과 선생님의 사랑으로 샛별처럼 돋아나는 기쁜 소식에 내가 흥분하는 까닭은 그들이 고향발전의 맥락을 잇는 튼튼한 동아줄로 역사 할 수 있기 때문이고, 성주의 인맥을 이어줄 인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강(寒岡 鄭逑), 동강(東岡 金瑀?) 양강의 학맥에 이어 최근세에는 최규동 서울대 총장, 김창숙 성균관대 총장, 이인기 영남대 총장, 이규석 국민대 총장 성기수 부산정통대총장 등으로 이어지는 성주 인재의 맥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김용철 대법원장을 위시하여 서석준부총리에 장관4명, 교육감이 4명, 국회의원, 학자, 차관, 군장성, 기업인, 문화, 예술인 모범영농가 등 각 분야마다 인재들이 즐비하다. 이는 성주인의 역사적 창조적 발전정신의 표상이다. 인구 3만의 적은 군세에, 한두학급의 영세학교에서 건국 후 60년의 짧은 기간동안 이 많큼의 많은 인재의 배출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더욱 그렇다.
오늘 여기서는 그중에서 나는 어느 특정 연예인의 고향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고향설, 나그네 서름, 번지 없는 주막 등을 부른 유명한 국민가수 백년설에 관해서이다. 그의 본명은 이창민이다. 그는 성주읍 예산동에서 1914년에 태어 낳고 1980년에 타계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성주 농업보습학교를 나온 후 노래에 소질이 많아 유랑극단의 단원이 되어 전국을 누비며 만주 간도 동포사회까지 공연을 하며 민족의 애환을 노래한 성주가 낳은 대가수이다. 당시 백년설 고복수 남인수 이난영하면 만인의 사랑을 받는 대 스타-들이었다.
고향설은 너와 나의 애창곡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일세.
깊은 맘 날려 오는 눈송이 속에 / 고향을 불러본다 고향을 불러본다
젊은 가슴아.
소매에 떨어지는 눈도 고향 눈 / 빰 위에 떨어지는 눈도 고향 눈
타과는 낯설어도 눈은 낯이어 / 고향을 뇌어보는 고향을 뇌어보는
젊은 가슴아.
이놈을 붙잡아도 고향 냄새요 / 저놈을 붙잡아도 고향냄새일세
내리고 나는 모란 눈 속에 / 고향을 적셔보는 고향을 적셔보는
젊은 가슴아.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치고 고향을 그리는 노래 한 두곡을 안 부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유난히 고향설을 좋아 했다. 타향살이가 고달프고 힘들 때 번지 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 고향설을 불렀고 그 중에서도 고향이 그리울 때 국민대중가요 고향설을 부르는 것은 나 자신을 위로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 음율도 내게 잘 어울리지만 그 가사가 너무나 서정적 감정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한 송이 눈도 그것이 고향 눈으로 보이고 눈송이 하나에서 고향을 느끼고 낯설은 타관의 눈송이에서 낯익은 고향을 되뇌어보고 고향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정서는 바로 시인의 감정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