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은 알다시피 우리 성주의 이웃인 칠곡군 가산면에 있다. 이곳은 대구와 22km가 떨어진 곳으로 839m의 유학산이 동남쪽으로 산줄기를 흘려내려 가산성이 있는 가산으로 이어지다가 동쪽으로 약간 방향을 틀어 한티재와 팔공산의 산줄기가 형성되면서 대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이 산줄기가 이어지는 가장 낮은 곳이 다부재이며 주변의 산과 골짜기가 바로 다부동으로 이곳은 옛날부터 경북 북부지방과 대구를 연결하는 주 통로이다. 유학산의 산세가 흘러내려 만든 골짜기인 다부동은 6.25전투에서 공산군에게 밀리던 국군이 대구를 사수하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싸운 격전지이다. 남진을 계속한 인민군이 대구를 함락시키기 위해 이 다부동에 3개 전투 사단과 1개의 전차 사단을 투입하여 '8월 총공세'를 펼치고 국군은 제 1사단을 투입하며 맞서 한달 넘게 격전을 치른 곳이다. 다부동과 유학산에서 1950년 8월 13일부터 9월 24일까지 전개된 전투에서 10여 차례를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인민군 1만 7천명, 국군 1만명이 사망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조그만 산과 골짜기가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을 것이다. 조지훈 시인은 공방전이 끝난 직후 이곳에 와서 '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 ------ 길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 ' 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 의하면 당시에 눈에 보이는 국군의 시체는 수습을 했겠지만 보이지 않는 산 속의 시신이나 인민군의 시체는 그대로 방치된 채 썩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 기념관을 짓기 직전 유해 발굴로 기념관 뒤에 295점의 유골이 묻혔다지만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유해와 유품 발굴은 전쟁 후 반세기가 흐른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 동안 다부동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이루어졌다. 이 기간동안 다부동을 지나다니면서 보면 전적 기념관에 군용텐트를 쳐놓고 6종(군대에서는 시신을 6종이라 함)을 담는 나무박스를 자주 실어 나르는 것을 보았다. 다부동은 전국에서 어느곳 보다 유골이 많이 발굴되었다. 2000년 전반기에만도 117구의 유해가 발굴되었고, 3년 동안 전국적으로 21곳에서 발굴된 유해 781구 중 이곳에서 발굴된 것이 1/4이 넘는 것으로 보인다. 유골과는 별도로 이 발굴에서 수습된 유물들을 보면 남북한군의 개인화기 및 실탄류가 주류를 이루지만, 학교를 다니다 학도병으로 출전한 병사가 가슴에 품고 다니던 삼각뿔자(플라스틱 재질의 자를 옛날에는 그렇게 불렀음)와 교복의 단추 그리고 만년필, 북한군 모자에 다는 붉은 별을 새긴 모장(帽章)과 소련제 군화 등도 있었다고 한다. 다부동의 발굴을 주제로 자작시를 한 수를 소개한다. 이 산 설고 물선 능선에 와서 나를 위해 스스로 판 개인 참호가 무덤이 되어 나 여기 죽어서 묻혔다는 말도 이르지 못하고 떠난 길을 산새도 울어주지 않고 날아가 버린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사 흙을 파 그대 깨어진 해골과 부러진 뼈와 공부를 하다가 학도병으로 달려나온 최승갑이 이름을 새겨 품고 다닌 삼각 뿔자와 교복의 단추를 수습하고 인민군 별표 모장과 소련제 군화를 수습한다. 엊그제 조국을 송두리째 내주었던 자들과 그 후손들이 이제 무엇을 지키기 위해 산 주름 악착스러운 이 골짜기에서 자신도 지키지 못하고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 하늘과 땅을 피로 물들였는가.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하고 나눌 것을 나누지 못하고 가지지 말아야할 증오만을 안고 싸움을 벌린 가증할 살육의 현장을 조국의 산하는 그래도 외면할 수 없었다. 무수한 파편들을 속살을 째고 깊이 묻어 두었다가 오십 년이 흐른 이제야 발굴로 역사를 증언한다. 인간의 아픔은 망각의 강이 씻어 가지만 아직도 상처의 자국이 선명한 조국 그 산하의 부러진 뼈를 잇고 찢어진 살점을 붙이자. 고랑을 파고 있는 이맛살도 풀고 부라린 눈망울의 살기도 풀어 동족의 피가 엉겨 붉게 녹쓴 철조망을 마음에서 걷어내자. 같은 민족끼리 싸우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나라들이 참전한 세계대전에 필적하는 끔찍한 전쟁이 끝난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아직도 우리는 전시 상태라고 하니 비극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고, 서로에 대한 증오와 미움도 다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미워하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북한과의 문제는 민족의 문제요, 집안의 문제이지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되지만 부자간 형제간에도 싸움이 나는 것처럼 같은 민족 내부에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동족간의 싸움에서는 비폭력 무저항을 주장하며 같은 민족 간에는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사상가의 말일뿐 현실 정치에서 비록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한쪽이 폭력을 행사하는데 다른 한쪽이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남북은 반세기가 가깝도록 세상의 어떤 적(敵)보다 상대를 더 미워해 왔다. 안창호 선생이 같은 민족 간의 무저항을 당부했지만 남북은 서로 전쟁을 하고 자신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상대를 적대시하며 미움으로 보낸 세월이 반세기가 넘었다. 이제 전쟁을 계획하고 진행한 직접적인 책임을 가진 세대는 거의 떠나고 없다. 다만 기성세대에 의해 교육받은 새로운 세대들이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시점이다. 지금은 화해하고 용서할 때이며 민족의 통일을 이룩해야 할 시점에 왔다. 그래야만 민족의 미래가 기약되는 것이다. 한동안 지난 정권의 대북 지원정책이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다. 물론 방법상의 잘못은 있을지 모르나 우리는 북한을 도울 수밖에 없다. 어느 누가 집권하더라도 북한을 도와서 경제적인 발전을 가져 와야하고, 그들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도록 우리가 뒤를 봐주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그래야만 전쟁터에 오면서 삼각자에 이름을 새겨 가슴에 품은 꿈 많은 젊은이들이 이름 모를 산골에서 삶을 처참하게 마감하는 '다부동의 혈전'이 없는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정복하거나 흡수하는 통일보다는 서로가 꾸준히 교류하면서 신뢰를 쌓고, 신뢰의 바탕 위에 안정을 찾고 협력하여 국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그리고 북한도 함께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우리 남한 국민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통일의 기회는 반드시 찾아오게 된다.
최종편집:2025-07-09 오후 05:43:02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페이스북포스트인스타제보
PDF 지면보기
오늘 주간 월간
출향인소식
제호 : 성주신문주소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3길 15 사업자등록번호 : 510-81-11658 등록(발행)일자 : 2002년 1월 4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성고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45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성고e-mail : sjnews1@naver.com
Tel : 054-933-5675 팩스 : 054-933-3161
Copyright 성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