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을 때 내 나이는 만으로 겨우 서른 살이었다.
본래 내 생김새가 홍안소년 같아 보였고 자라면서 여드름 하나 나 본 일이 없다. 그런 나머지 그 무렵까지 나는 학생같이 보였다고 한다. 여차장이 승객의 차비를 받던 그 시절에 시내버스를 타고 천원짜리를 주면 학생으로 오인되어 거스름이 나왔다.
이 무렵 나는 가정학과 모수미 교수의 소개로 독일로 송출할 파독간호사 교육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오전에 영양학 강의를 마치고 막 강의실을 빠져 나오려 하는데 몇몇 간호사들이 나를 둘러싸고 질문공세를 퍼붓는 것이었다. 집이 어디냐? 나이가 몇이냐? 결혼은 했느냐? 애인은 있느냐? 어떻게 그렇게 강의를 잘 할 수 있느냐? 등의 질문이었다. 별 대답을 않고 빙그레 웃으면서 교육장을 빠져나왔다.
그로부터 몇 달의 세월이 흘렀다. 하루는 독일로부터 편지가 한 장 날아들었다. 내용인즉, 강의를 참 잘 하드라, 매우 인상적인 젊은 교수 같더라, 결혼은 했느냐 등등의 질문으로 시작된 편지가 떠나기 전에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출국수속이 복잡했고 떠나는 날짜가 촉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 등이었다. 자기도 좋은 대학 출신의 간호사인 만큼 가능하면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가 되고 싶다고 했고 독일 오는 길이 있으면 꼭 만나고 싶으니 연락을 해달라는 핑크색 편지였다. 편지 말미에 반드시 답장을 해 달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답을 뭐라고 써야할지 몰라서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그만 양복을 바꿔 입는 과정에서 집사람에게 들키고 말았다.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우리 집사람의 반응은 매우 차분하였다. 편지 답장을 기다릴, 독일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을 그 간호사에게 답장을 쓰되 나는 장가를 간 사람이고 딸까지 있는 유부남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라는 것이었다. 추신으로 우리 가정 평화를 위해 다시는 이런 편지를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하라는 명령투(?)의 의견이 붙기까지 했다.
나는 끝내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 간호사에게 답장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은 나이가 65세는 되었을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결혼은 했을까?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할 수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