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앞산 너머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어 그런지 하루하루 어둠도 점점 빨리 우리에게 다가오는 듯 했다.
“문 열어라, 우리 공주들, 아빠가 오셨다!”
한창 이야기 주머니가 펼쳐진 메신저 대화창을 후다닥 닫고 문 앞으로 달려갔다. 아빠와 나 사이에는 항상 ‘어색함’이 있어, 나는 쭈뼛거리며 술에 취해 비틀거리시는 아빠를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아빠가 집안으로 들어오시더니 이내 나와 동생들을 부르셨다.
“수비, 주현이, 지수 다 이리와 보거라!”
“네, 아빠”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로 우리 세 자매는 어딘가에 끌려가기라도 하듯 아빠 앞에 가서 앉았다. 평소에도 엄하고 무서우신 아빠지만 술이라도 드시면 정말 귀신보다 더 무서운 분이 우리 아빠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말씀을 하실까 겁에 질려하며 귀를 세우고 있었다.
“수비 요즘 공부는 잘 하고 있지? 그래 그래… 음… 엄마한테 잘하고! 요새 왜 그렇게 엄마한테 막 달려들고 그래. 너희가 엄마 없어봐라. 살 수 있을 것 같냐? 응?”
“네 잘못 했어요 아빠. 안 그럴게요, 절대”
이렇게 주절주절 아빠의 주정은 우리를 상대로 끊임없이 늘어졌다.
예전부터 그래오셨지만 우리아빠는 술을 정말 좋아하신다. 하지만 요즘 들어 술을 더 많이 드시고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며 아무래도 줄어든 회사 일 때문이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리에겐 항상 강한 모습만 보여주시지만 아빠도 사람이기에 말 못할 걱정과 가장으로써의 부담은 큰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다음날, 엄마와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와서 늦게 일어나는 우리 엄마에겐 아침일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엄마와 식사를 하니 모녀 사이에 할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 전날 아빠가 술을 드셔서 더욱 그랬다.
“어제 또 아빠가 너희보고 뭐라 안하시데?”
“그랬지. 아빠가 술 드시면 항상 그렇지 뭐”
“으이그, 또 그랬구만! 이 양반이 진짜 나이가 좀 들었으면 이제 자기 건강도 쫌 챙기든지 해야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만 하는지 몰라요. 딸 좋은 학교 가는 것도 못보고 눈감겠다!”
그냥 들으며 밥을 먹고 있던 내 귀에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엄마의 울음소리였지만 나는 기어이 모르는 체하며 밥을 먹었다. 엄마를 보면 나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아빠의 술주정으로 결혼 후 내내 고생했던 분이 바로 엄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빠는 술을 드시고 늘 엄마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시곤 했다. 엄마의 몸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나와 동생들의 머리가 어느 정도 커져서 이제 그렇게 심한 행동은 하지 않으시지만 최근에 아빠의 음주빈도가 높아지니 엄마가 예전 생각이 나셨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훌쩍이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또 한 번 내 귓가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빠 어제 담배도 피우셨다더라”
정말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충격에 휩싸여 밥을 먹고 있다는 것도 잊고 그저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빠가 언제, 어디서 피웠는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힘들어하시는 아빠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질 뿐이었다. 아빠가 담배 피우셨다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 놀라는 나를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몇 해 전, 담배 때문에 폐에 생긴 종양으로 위급하셔서 폐 수술을 받아 그나마 회복되어가시던 아빠였다. 담배 때문에 정말 죽을 고비를 넘길 뻔했던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담배를 피우셨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보다가 역시 회사 일이 줄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요즘 너무 힘들어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아빠에게 뭐하나 잘해드릴 것 하나 없는 내가 너무나 서글퍼졌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장녀인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아빠에게 항상 감사하면서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기만 했다. 그래서 나도 이제는 내 마음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아빠가 이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항상 든든한 후원자가 될 것이다. 또 아빠에게 내 마음이 닿아 아빠의 주름살이 활짝 펴질 날의 얼굴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수상소감
나는 태어나서부터 16년간을 경북 성주군에서 살아가고 있다.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고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기에 소중한 나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일기를 즐겨 쓰곤 했다. 지금도 낡은 책장에 꽂혀 있는 일기장을 보면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라 추억에 잠기곤 한다.
이제는 나의 고장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고등학교를 다른 지역으로 진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주에서의 마지막 한해를 보내며 나는 성주문학상이라는 대회에 글을 응모하게 되었다. 글을 쓰는 데에 그다지 솜씨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담아 정성껏 작품을 썼다. 무심코 지나치고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나에게 좋은 영감을 주는 경우가 많아 나는 일상에서 느껴지는 작은 감정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뜻밖에도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입상하게 되어 기쁘다. 더 열심히 하라는 동기로 삼고 앞으로 무슨 일이든 최선과 정성을 다 할 것이다. 두서없이 쓴 소감이지만 마지막으로 나의 미흡한 작품에 높은 평가를 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