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아버지가 나에게 일깨워주신 가장 소중한 유산은 ‘정직과 명분’입니다. 큰 잘못을 저질러도 사실대로 아뢰고 뉘우치고, 다짐하면 봄볕에 눈 녹듯 스스럼없이 용서해 주셨지만, 조그마한 잘못도 변명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사정없이 회초리로 닦달하셨기 때문에 정직한 것이 편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방편임을 알았습니다. 명분이 서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아버지의 걱정과 노여움은 온 가족을 불안에 떨게 했습니다. 잔재주를 모르고 표리없이 곧이곧대로 살아가는 마음가짐과 넘어서는 안 될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행동하는 몸가짐은 가볍고, 고집스럽고, 거만하다는 엉뚱한 오해와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물질만능의 타락하고 퇴폐한 이 시대를 살아오면서 우뚝이 서 있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한 달여 전이라 기억됩니다. 저나 아이들 4형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목욕탕에 가면서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업어드리려 했으나, 약한 저의 힘과 능력으로는 아버지를 업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통곡했습니다. 목욕탕에서 나무껍질 마냥 거칠고 메마른, 윤기 없는 아버지의 육신을 문지르면서 엄동설한에 어느 길가에 외롭게 서있는 앙상한 겨울나무를 연상했습니다. 모자람 투성이에 어리석은 아들 뒷바라지와 가문을 지키시느라 인고의 아픔을 견디어 오신 결과라 생각하니 부끄럽고 죄송하여 아버지를 바라 뵈올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흘리신 피와 땀과 눈물의 뜻을 망각한 채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온 자신이 저주스럽고 부끄러워 통한의 아픔을 삭이느라 몸부림쳤습니다. 그 날 이후 겨울나무같이 앙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아버지같이 부끄러움 없는 떳떳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자문해보지만 앞서는 건 두려움뿐입니다. 아버지! 영원히 저만의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싶었던 부끄러운 사실 하나를 고백합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한 1957년 이른 가을이라 기억됩니다. 아들의 객지생활이 걱정되고 안쓰러워 상경하신 아버지와 번화한 종로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주위를 오고가는 사람들의 윤기 흐르고 번지르르한 겉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고생에 찌든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와 함께 살의가 깃든 증오를 느꼈습니다. 정말 찰나였습니다만 너무 강렬했습니다. 인간실존의 단편적인 현상이라고 변명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죄를 범했습니다. 그 엄청난 찰나가 스쳐간 순간, 난 초라한 아버지가 오히려 위대하고 훌륭하고 소중한 분이란 사실도 함께 깨달았습니다. 언제나 뉘우치고 다짐하면 관대하게 용서해주시고, 두둔해주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그 맑고 치기어린 웃음과 함께 이젠 그 날의 죄 또한 용서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듯 쇳덩이같이 굳센 줄만 알았던 아버지께서 이 못난 아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두 번 보았습니다. 대학 2년을 마치고 자원입대하던 날, 대구역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고된 군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염려하는 자식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논산 제2훈련소에 면회 오셔서 “내 자식 남의 자식 할 것 없이 모두 다 새까맣노.” 하시며 흘리신 눈물인데 그것은 고된 군생활을 극복하고 적응해 가는 아들의 모습이 대견해서 흘리신 안도의 눈물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 때문에 흘리신 눈물이 어찌 두 번 뿐이셨겠습니까? 아버지의 전 생애가 못나고 어리석은 이 아들 때문에 흘리신 눈물의 역정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1985년. 10. 24. 중에서
최종편집:2025-05-19 오후 0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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