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형성을 돌아보다
초전면 소재지가 대장리(大獐里)다. 구릉성 평지에 자리해 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마을 주변에는 낙동강의 지류가 흐른다.
조선시대(1700년경)에는 대마(大馬)라 칭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장동으로 바뀌었다. 행정구역은 1952년 1·2로 나뉘었다가 1975년 2동을 2·3동으로, 1987년 1동을 1·4동으로 각각 나눈 가운데, 1988년 5월 동(洞)이 리(里)로 개칭되며 대장1·2·3·4리로 됐다.
대장2리의 자연촌은 ‘도천(道川) 마을’로 조선 정조 원년(1777) 송시흠(宋時欽)이란 선비가 입향해, 학문으로 입신하는 문사(文士)의 마음을 중히 여겨, 북송의 대학자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형제의 이름 글자를 따 도천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명도 선생으로 잘 알려진 형 정호(호 명도, 1032∼1085)와 이천 선생으로 불리운 아우 정이(호 이천, 1033-1107) 두 형제는 이정자(二程子)라 일컬어지며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이 같은 역사가 널리 알려진 데는 송준경(53) 이장의 열정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5년 전 처음 이장을 맡으며 뭔가를 해보고 싶다며 한 해 이장수급이 없는 셈치고 자비로 도천 마을의 이정표와 수호신 역할을 할 장승을 마을 앞에 세웠단다. 2개월 전에는 회관 준공식도 가졌고, 지금은 고향을 지키는 이와 그리는 이 모두에게 발자취를 전하기 위한 동보 발간을 추진 중이다.
송준경 이장은 “우리가 역사에는 무관심한 체 그저 오늘을 사는 데 그친다면, 후세는 역사를 알 기회조차도 가질 수 없다”며 “후손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며 내 고향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생기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회관 준공과 함께 휘호를 정이천 선생이 전파한 종본이언과 부합된 ‘수신제가’로 새겨 넣었다”고 말했다.
원로 어르신들은 “오랫동안 마을에 살면서도 제대로 된 역사를 알 수 없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제대로 알게됐다”며 “예전에는 마을 앞에 내(川)가 흘러 도천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 지금에라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역사는 묻힐 수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런 전통이 있어서인지 교육열도 높고 인재도 많은 것이 자랑이다.
근래에도 서울대·고려대 등 소위 명문대 배출의 저력을 보인 가운데, 6·7대 국회의원이자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사무차장을 지낸 송한철씨와 문상칠 용암중 교장, 문재환 전 성주부군수 그리고 카이스트 연구원. 대학교수, 의사, 박사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며 마을의 명예를 빛내고 있다.
■주민들에게서 마을을 듣다
참외의 고장에 속하기에 주작은 참외로, 5∼60대가 주축이 돼 부농을 이루고 있다지만 근래 젊은 세대가 점점 줄어 걱정이다. 도천은 마을안길이 잘 정비돼 있다.
도위정(59)씨는 “새마을사업 당시 주민들이 모두 보상도 없이 개인토지를 내놔 통로를 넓게 닦아놓은 것이 특징”이라며 “참외 출하 때 5톤 트럭이 들어와도 가지 못하는 길이 없어 편리하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너른 통로는 자랑거리이자 취약점이 되기도 한다. 소통이 원활하다보니 절도사건이 잦아 문제다. 주민들은 “2008년엔 한번도 아니고 3번이나 도둑이 들었고, 심지어는 자고 있는 방에까지 들어왔다니 여자들은 불안해한다”며 “그래서 어떤 이는 자비로 CCTV까지 설치할 정도”라고 한다. 주민들은 “마을 안에 4∼500만원이면 CCTV 설치가 가능하다지만 최근 회관을 짓느라 돈을 많이 써서 어려움이 있다”며 “알아보니 영천이나 경산, 청도 등은 지자체 보조로 설치하기도 했다”며 CCTV 설치 지원을 희망했다.
정미정 기자
※마을 이야기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신 송준경(53) 이장과 도위정(59)씨를 비롯해 이름을 밝히기 꺼려하시는 어르신들과 마을 곳곳의 사진 촬영에 협조해 어르신 그리고 자료 조사에 협조해 주신 초전면 류철구 면장에 감사 드립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