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학 (사)박약회 부회장
→전편에 이어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진료를 맡았던 친구 분인 박 선생님을 통해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지만, 평시와 다름없이 담담하고 대범하게 최후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보름 쯤 전이라 기억됩니다. 아버지께서는 최후를 생각하시고 하신 말씀이었지만 무디고 둔한 저는 그 말씀이 유언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병세의 차도를 묻는 저에게 “괜찮다.”는 말씀과 함께 느닷없이 “네가 내 자식이지만 고맙다는 말은 꼭하고 죽어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란 저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며, 아버지가 저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그마하고 소박한 당신의 소망과 기대를 제대로 채워드리지 못했으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사슬에 얽매여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자책과 회한 속을 자맥질하며 살아가는 불효막급한 아들을 꾸짖고 나무라기는 고사하고 “고맙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은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어 나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저승에서나마 고맙다고 대견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게 처신하고 조신하여 몸가짐, 마음가짐을 반듯이 하라는 경계의 말씀으로 새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말씀은 “내 한평생은 아무런 여한이 없다. 그러나 너에겐 너무 과중한 짐을 맡겨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세속에 물든 삶이란 털어도 털어도 묻어나는 아픔과 회한이 있게 마련인데, 아버지의 80평생, 파란 많은 역정 속에서 켜켜이 쌓인 고통과 아픔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만 당신이 져야 했던 책임과 역할에 거리낌 없이 정성을 다하셨다는 안도와 만족의 말씀으로 새기고 있습니다.
저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웠다는 말씀은 나를 종가에 승종시켜 막중한 책임을 맡겼다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한때 전생에 지은 죄값으로 종손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이 집을 위해서 모는 것을 희생해야 한다.”며 나를 질식시키던 집안 어른 분들의 말씀에 멍에를 궤고 맷돌질하는 당나귀 같은 종손이 저주스러웠습니다. 40대 중반까지 종손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등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종가의 일은 섭사손으로서 아버지가 대행하셨으며, 나는 직장과 생업을 핑계로 종손의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으나 결과적으로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벗어나려고 하면 결국 자신이 망가진다는 기막힌 진실을 알았습니다.
1976년 퇴락하여 허물어져가는 정침과 대문채를 보수하고 “이제는 저승에 가서 조상님을 뵈올 면목이 섰다.” 시며 흘리신 아버지의 눈물을 보면서 자손의 도리와 종가를 지키는 막중한 책임을 깨달았습니다. 지키는 외로움과 수호하는 고통을 극복하고 긍지와 보람으로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아무나 질 수 없는 짐을 졌기에 영광과 존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들 하나를 종가에 승종시킨 아버지의 결단과 숭조상문의 순수하고 애절한 효심에 머리를 숙여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욕심이 많았다.”는 말씀은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라 소상하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6.25사변이 발발한 이듬해에 할아버지께서 향년 83세로 영면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유택을 마련할 때 지관이 아버지께 “이 혈에 산소를 쓰면 장차 장손의 수족에 화가 미치는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은밀하게 묻기에 발복이란 욕심이 앞서 괜찮다고 대답하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맏아들 재근이가 고향집에서 돌잔치를 치르고 돌아온 날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습니다.
소아마비 치고는 비교적 가벼운 편이지만, 바르게 걷지 못하고 절름거리는 맏손자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욕심이 화근이 되었다고 자책하시며 괴로워 하셨습니다. 할아버지 산소 탓이 아니라 우리 내외가 무지하여 예방접종을 하지 못한 탓이라 말씀드렸지만 끝내 아버지의 회한과 오해를 풀어드리지 못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