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수은주가 영하14.5도를 오르내리던 혹한에 보일러가 고장났다. 보일러 제작사는 기기 이상은 없다고 하고 설치 시공사도 같은 대답이었지만 방은 점점 식어만 갔다. 제작사와 시공사가 번갈아 왔다가도 정상 가동은 되지 않았고 추위는 맹위를 떨치는데도 서로 상대방만 탓하고 있었다. 우주로켓도 발사하는 나라에서 그까짓 보일러 하나 못 고친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무적차량을 ‘대포차’라 하듯 보일러도 무허가 수리업자가 있다고 하여 왕진(?)을 시켰다. 면허의도 못 고치는데 무면허의가 어떻게 고칠까 하고 반신반의했지만 또 냉골에서 밤을 샐걸 생각하니 까마득하여 의뢰를 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은 이럴 때나 쓰는 격언일까? 1차 점검을 하더니 온수관에 에어(공기)를 빼줘야 한다고 했다. 작업을 끝낸 지 5시간이 흘러도 중증을 앓는 방바닥은 온기를 찾을 줄 몰랐다. 또 냉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보일러와 방, 거실의 순회 점검이 시작되었다. 몇 차례 점검 끝에 보일러 가까운 쪽부터 응달에 볕이 들듯, 냉기와 온기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도 아내도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너댓새나 투병 끝에 쾌차한 보일러이니 그럴 만도 했던 것이다. 마치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육지다!”하고 소리쳤던 것과 같았다고나 할까. 보일러가 정상 가동이 되어도 순회 점검을 빼놓지 않았다. 자다가도 보일러실 문을 열고 안부를 묻고 방마다 이불 밑에 손을 넣어 확인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출타했다 돌아오기가 무섭게 보일러 안부부터 먼저 물었다. 보일러가 사람 걱정을 해야 하는지 사람이 보일러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기온 변화에 따라 실내 자동 감지기가 내려가기만 해도 또 가슴이 철렁했다. 그야말로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되기도 했다. 한 번의 보일러 고장으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됐다. 밖에서 돌아와서는 보일러 안부부터 묻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이불 밑에 손 넣어 보기, 감지기 점검, 심지어 모터 돌아가는 소리까지 경청을 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거의 무심히 지나쳤지만 호된 홍역을 치르고 나서부터는 보일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소중함도 알게 됐으니 말이다. 만일 그 보일러가 부모님이었다면 내가 그렇게 아침저녁 문안을 드리고 건강 걱정을 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아니라고 한 마디로 자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 계실 때 단 하루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아침 저녁으로 부모님 문안을 드린다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성어가 있다. 내 부모님께도 해 드리지 못한 혼정신성을 아이러니 하게도 보일러에게 해 보인 셈이었다. 이 세상 만물이 다 그 존재이유가 있고, 우리들 인생살이에서의 스승은 곳곳에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는 내게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라지만 인간만이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길바닥을 함부로 구르는 낙엽, 제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 다 타버린 연탄재, 자신을 데워 인간을 따뜻하게 하는 보일러에게서도 가르침은 있었다. 자식에게는 언덕이 되고 울이 돼 주셨던 부모님을 우리를 덮여주는 보일러에 비교하는 것이 불경이 될지는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바쁜 현대인의 생활에서 여차하면 부모가 아들의 얼굴도 잘 볼 수 없음이 일상이다. 그런데 어느 집에 퇴근하면 부모방보다는 애완견부터 먼저 들여다보는 아들이 있었다. 생각다 못한 어머니는 어느 날 개집 옆에 이불을 둘러쓰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머니! 왜 여기 계세요?” “얘야, 하도 네 얼굴 본지가 오래 돼서…” “참 어머니도…” 물론 세태의 일면을 풍자한 픽션이다.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어느 집 며느리가 시아버지 잠자리에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 있었다. 이를 본 시아버지가 “얘야 너 왜 이러느냐?” “저요? 아버님 이불 속이 찰까 봐 미리 덮히느라고 그랬죠” 이도 물론 코미디의 한 소재이다. 효도는 그리 먼데 있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라고 세상의 많은 부모님들은 말한다. 비단금침에 기름진 음식이 아니어도 좋고 내(부모)마음 편케만 해주면 좋겠다고 한다. 열심히 살고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말거라. 사람노릇 제대로 하며 살라고 한다. 효도가 백행의 근본이라 하였다. 세태의 변화에 따라 효도의 원형도 행태도 많이 변했다지만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불변의 이치야 어찌 변하겠는가.
최종편집:2025-07-09 오후 05: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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