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많이 아팠던 나는 스물네 살 때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힘들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름시름 앓다가 악성빈혈이 너무 심해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직장동료인 친구가 찾아와서 업고 달려간 곳이 약전골목 어느 한약방이었다. 친구의 아제라는 청년이 지어준 약을 먹고 2개월이 지나서야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심장과 위장은 계속 치료를 해야 했다.
그 후 일 년 동안 지극 정성으로 치료해 준 그 청년의 정성에 감동한 나는 그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고 아무런 준비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은 성격이 너무 깐깐하고 철저해서 힘들 때도 많았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삼남매를 키우면서 바쁜 일과 중에도 지난날 못 다한 공부가 늘 하고 싶었고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않았다. 나의 향학열은 식을 줄 몰랐고 남편을 졸라 가까스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1990년 둘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교장선생님의 권유로 학교 어머니회 회장을 맡았다. 4년 동안 활동하면서 학부모들이 학교를 바로 보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는 점이 안타까워 겪었던 경험을 정리해서 교육청행사 때 ‘학부모는 학부모로서 노력이 필요하다’란 주제로 사례를 발표한 것이 인연이 되어 교육장님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유치원, 초, 중, 고, 교육청 등에서 부모교육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96년 3월 친구가 찾아와 4개월 후면 돈이 나온다면서 빌려달라고 했다. 겁 없이 다른 친구들의 돈을 빌려서 건네준 액수가 1억8천, 이듬해 정신 차리고 보니 빚은 2억5천이 넘게 불어나 있었다. IMF를 맞으면서 친구의 사업은 부도가 나고,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이자에 이자까지 고스란히 나의 빚이 되고 말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어리석었던 내 자신이 부끄럽고 너무 기가 막혀 어느 누구에게 말 한마디 못한 채 몸부림쳤던 지난 14년의 긴 세월. 그동안 내가 겪었던 기막힌 일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소중한 내 삶을 포기할 수 없어 틈만 나면 책을 보고 공부했다. 그러는 나를 남편은 함께 공부하자면서 나주대학 한약자원학과 2년 과정을 시작해서 졸업하고 다시금 대전 중부대학교에 편입학하여 막내아들과 같은 과 같은 학번이 되어 공부했다.
지난 14년! 그동안 남편과 함께 먼 길 다니면서 공부했던 보석 같은 소중한 추억과 몸서리치도록 힘들고 서럽고 괴로웠던 시간들이 뇌리를 스치면서 인생은 참으로 힘든 것이구나란 생각을 해 본다.
남들은 나를 보고 유난히 눈동자가 맑다고 한다. 그리고 인상이 너무 좋고 밝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남몰래 많이 울어 눈이 맑고,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 저질러 놓고 기가 막혀 자꾸만 웃어서 밝고, 돈 빌려간 친구 욕하고 원망할 시간 없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분노를 삭이는 방법을 알았기에 용서하면서 그저 열심히 열심히 돈 갚는 일에만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정작 내 자신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동안 어리석은 나로 하여금 많은 희생을 해야 했던 소중한 내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제 올해로 그 지긋지긋한 빚을 모두 청산하려 한다. 스스로 나에게 너무 가혹했던 것에 대해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해서 이제는 나 자신을 용서하려 한다.
백령도 초계함 침몰 사고를 지켜보면서 깊고도 차가운 물 속에 피붙이를 두고 질식할 듯한 암담한 시간을 견디는 가족을 지켜보면서 그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와 이 봄 크게 몸살을 앓았다.
깊은 밤 죽음을 며칠 앞둔 어린 아들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면서 글을 쓴 유달영 교수님의 수필 ‘슬픔에 관하여’ 마지막 구절을 다시 꺼내 읽어본다.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없이 총명해 보이는 내 아들의 잠든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이 영혼을 정화시키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을 지그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신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나의 삶 속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겪는 곡절이겠지만 그 속에 잘 쓰여진 한편의 시처럼, 한편의 드라마처럼 반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래서 청중들은 나의 목소리에 진한 감동을 느끼며, 귀를 기울이나 보다. 그리고 격찬과 함께 강의 요청이 끊이질 않고 있다. 세상엔 공짜도 그저 되는 것도 없다고 누가 말했는지, 지난날 세상이 내게 준 고난의 세월은 나를 멋진 강사로 거듭나게 하기 위함이었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내 나이 57세! 이 순간 나는 이렇게 외쳐 본다.
‘향이야 너는 네 세상 어디쯤 와 있느냐고,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고, 소중한 오늘을 살자고…’
지난해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은 세 번의 수술 끝에 강한 의지로 살아서 이제 건강을 되찾았다. 그동안 진실로 나를 사랑해 준 남편, 착하게 잘 커준 우리 영남 주하 지용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올해 나의 바람이 있다면 자투리 빚 정리 다 하고 TV 1대 사서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DVD로 보고 또 보면서 내 가슴 속에서 영원토록 살아 숨쉬는 이순신 장군의 나라 사랑 이웃 사랑하는 그 고귀한 정신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