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우리의 시조, 다정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시인이신 이조년 선생이 지은 것이란 것은 국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 터이다. 국문학, 특히 시조문학에 조예가 없는 둔재인 나이지만 그 어른의 출생지가 내 고향 성주 땅이기 때문에 나는 다정가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어른이 우리 성주 출신이라는 것보다 더 특별한 사연 하나가 있어서 나는 다정가를 어느 시조보다 더 애송하고 있으며 어느 누군가가 다정가를 읊을 때면 나의 늙은 심장은 사춘기 소년의 염통처럼 힘차게 고동을 치는 것이다.
영남이란 큰 땅덩어리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가는 칠백리 낙동강이라면 오천만 대한민국 국민 중 젖먹이 어린아이 말고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가천이라면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가천은 낙동강의 많은 지류 중 하나이며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소재 수도산을 시원으로 해서 고령군 지역의 회천이란 개천과 합류하는 물줄기 이름이다. 대가천과 합쳐진 그 물길은 고령군 우곡면에서 거대한 낙동강 본류와 합수가 된다.
대가천은 수도산에서부터 회천과 만나는 데까지 백여리나 되는 큰 개천이다. 대가천 유역은 산이 높고 수려하고 물이 수정처럼 맑다. 이 개천가의 마을 중의 하나인 갖말이란 데가 고향이기도 한 대 성리학자 한강 정구 선생이 극찬을 한 명승지이기도 하다.
성리학의 태두인 중국 남송의 주자(朱子)가 당신의 은거지인 무이산 주변의 아홉군데의 절경을 노래한 무이구곡을 만들었다. 한강선생도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받아서 대가천 주변의 아홉 군데 절경을 노래한 이른바 무흘구곡을 만들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거니와 일백리 대가천은 산자수명한 곳이다.
회천과 멀지 않은 지역 중 행정구역으로 경북 고령군 운수면이란 고장이 있다. 운수면의 人마을은 나의 제일 큰 이모가 살았던 곳이다. 어머니는 여자 형제가 네 자매인데 그 중에 어머니는 둘째 따님이다.
나의 큰 이모는 열여섯 살에 이모부가 혼인을 해서 人마을에 살았었다. 나의 외가는 성주에서 아무개 가문하면 알아주는 명문 거족의 후예이다. 내가 청소년 시절만 해도 자녀들의 혼사가 있을 때는 반상의 차별관념이 대단해서 나의 혼담이 있을 때도 부모님은 나의 혼처를 양반가문에서 찾으려고 무진 노력을 기울였다.
나는 이십대에는 서울에서 살았다. 내가 어느 해 추석 때 귀성을 했더니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고령군 운수면에 있는 큰 이모댁에 다녀오라고 했다. 그 곳 큰 이모가 그 곳에 적당한 처녀가 있으니 내가 귀성하거든 큰 이모집에 다녀가라 해서였다. 그 당시는 대가천 상류쪽에 있는 우리집에서 고령의 큰 이모댁까지의 거리가 팔십리나 되었지만 버스조차 없었기 때문에 걸어가야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나로서는 팔십리쯤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그리 큰 힘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운수면 큰 이모댁으로 가는 길은 모두가 대가천변이었다.
천변의 기암괴석이며 하늘을 볼 수 없을 만큼 울창한 수림들은 과연 한강 정구 선생이 무흘구곡을 지어서 찬미할 만큼 풍광이 수려했었다.
인걸은 지령이란 말대로 그렇게 수려한 산하가 있기에 운수면의 큰 이모님 마을엔 재색을 겸비한 규수 하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나는 부지런히 운수면을 향해서 걸었다.
그날 석양 무렵에 큰 이모님댁에 도착한 나는 이튿날 큰 이모님이 소개한 처녀를 만났다. 여고를 졸업하고 고령읍에 있는 어느 공공기관의 여직원으로 근무한다는 그 처녀와 어느 다방에서 이른바 맞선을 보았다. 신부감은 박색도 일색도 아닌 평범한 처녀여서 나의 춘정을 들뜨게 할 만큼의 끌림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님이나 큰 이모님이 소망하는 양반집 후손이었고 처녀의 아버지도 군청의 과장급쯤 되어서 우리 집 가세보다 못할게 없었다. 만약에 이변이 없었다면 어디 한 가지도 특출한 데가 없는 나로서는 그 처녀와 혼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천동지의 이변이 있었다.
그날 저녁 이모집에는 이종사촌 여동생인 인자의 동무라는 처녀가 인자와 놀기 위해서 왔었다. 그 처녀는 한마디로 대가천의 정기를 받고 타고난 가인이라 할 만큼 내 마음을 끌었다. 이목구비가 반듯했으며 특히 도톰한 콧등은 주름살이 없을 터였고 그 콧등만 보면서 백년해로하며 사랑할 것 같기만 했다.
남들이 무어라 하든 그녀가 나에게는 한강선생이 극찬한 무흘구곡의 정기를 받은 요정으로 보였었다. 낮에 고령읍 어느 다방에서 보았던 그 처녀에게 조금 기울었던 내 마음을 몽땅 무흘구곡의 요정에게 통째로 옮겨서 쏟아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