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의 말에 의하면 무흘구곡의 요정은 외모나 품행이나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지만 학교는 시골서 중학교 밖에 다닌 게 없으며 더구나 요정의 아버지는 가난해서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남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물불을 가릴 것 없이 그녀에게 경도되어 버렸다. 나는 서울에 와서도 인자에게 편지를 써서 그 요정과 혼인을 성사시켜 달라고 했고 종단엔 그 처녀에게 직접 편지로 여러 번 청혼을 했다.
물론 부모님이나 큰 이모는 노발대발 반대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처녀 아버지가 가마 메는 상놈이라도 좋고 그 처녀가 국민학교만 졸업해도 문제가 없을 듯 했다. 나는 그 처녀가 나의 청혼에 감지덕지하고 응할 줄 알았는데 허사였다. 설날에 집에 갔던 나는 부모님께 세배만 하고 운수면 큰 이모댁엘 갔었다. 그때도 팔십리 대가천변 길을 걸어서 갔다. 폭설로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팔십리 개천길을...
이종사촌 여동생 인자의 알뜰한 주선으로 이모집 건너방에서 그 처녀를 만난 나는 한마디로 일촌 간장이 녹아 버릴 것처럼 그 처녀의 잘생긴 코가 더 예뻐 보였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천한 저를 과찬해 주시는 선생님께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죄송하지만 저는 부모님도 모르게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요. 그리고 결혼도 곧 할겁니다.” 하는 게 아닌가.
그녀는 내가 싫지는 않다는 뜻으로 시조 한 수를 읊겠다고 했다. 그 시조란 고령군 운수면 출신인 이조년 선생의 라고 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많고 많은 시조를 다 두고 냐고 물었더니 이조년 선생이 고령군 운수면 출신이기에 그곳 사람들은 모두가 다정가를 특별히 애송하고 그녀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다정가를 지은 이가 이조년 선생이라는 것은 알아도 이조년 선생의 출생지가 그곳이라는 것을 몰랐다. 대가천변이 아름답기에 한강같은 대성리학자가 출생한 줄만 알았던 나는 이조년 선생도 대가천의 정기를 받은 분이란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나는 나대로 대가천 무흘구곡이 있기에 대가천의 삼절(三絶)이 탄생했으리라 단정했다. 그 삼절이란 한강선생, 이조년 선생, 그리고 내가 혹한 운수면 人마을의 그 요정이라 단정을 한 것이다. 송도에 황진이, 박연폭포, 서화담 등의 삼절이 있듯이.
나는 고령 큰 이모가 소개한 그 처녀와도 결혼을 하지 않았고 지금의 아내와 혼인해서 아들 딸 낳고 살고 있지만 운수면 人마을의 그 요정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요정은 천만뜻밖에도 한쪽다리를 6·25전쟁 때 잃은 어느 상이군인과 결혼을 했었다. 그것도 죽은 전처의 아이가 셋이나 있고 나이도 요정보다 열 살이나 더 많은 기혼 남자였다. 내가 구애를 했을 때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요정의 말은 모두가 거짓말이었다.
6·25전쟁이 치열할 때 대가천변에서 마을 아이들이 군인들이 버린 수류탄을 만지다가 폭발을 할 때 그 파편 하나가 그때 곁에 있던 요정의 하복부에 박혔고 그 요정의 자궁은 크게 다쳐서 그 요정은 천추에 한이 될 불임녀가 된 것이란다. 그 일은 그녀와 그녀 부모와 그녀의 상처를 치료했던 의사밖에 몰랐었다. 그 일 때문에 그 요정은 나의 구혼을 거절했고 상이용사에게 시집갔다는 사실을 먼훗날 그녀가 상이군인에게 시집간 후 인자에게 고백해서 인자도 알았고 인자는 나에게 그 일을 알려 준 것이다.
알고 보니 그녀의 얼굴도 아름다웠지만 마음씨도 비단결같이 고와서 전처자식 삼남매를 친자식같이 알뜰하게 키웠고 가난한 사병출신 상이군인 남편에게도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열녀였다는 것은 인자로부터 듣고 알았다. 그 후 나는 그녀를 요정보다 뜻이 다른 천사 또는 관세음보살님이라고 불렀다. 지난해 고령읍에 사는 인자로부터 나에게 전화가 왔다. 무흘구곡의 그 관세음보살님은 부산에서 살고 있었는데 보살님의 남편은 오래 전에 죽었고 그녀도 큰 병으로 병원에서 죽음직전에 있다며 나에게 한번쯤 문병하는 도량이 넓은 남자가 되어 보라 했다.
냉혹하고 요염한 요정이라 해도 사경에 있는 여인이라면 문병해야겠거늘 천하에 둘도 없는 관세음보살이오 천사의 임종인데 내가 왜 인자의 부탁을 거절하겠는가? 인자의 전화를 받던 나의 늙은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만 했다.
병상에 누운, 칠십노파가 된 대가천 무흘구곡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그 보살의 그 옛날 화용월태는 간곳이 없고 피골이 상접이 된 반송장이었다.
다만 옛날 처녀 때 신비스럽고 예쁘기만 하던 그 콧등은 주름살 하나 없이 그대로 오묘하게 돋아 있었다. 나는 뼈만 남은 그녀의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한번도 그 보살을 저주도 원망도 않고 칠십여 성상을 그녀를 그리워 했노라고 고백도 했다. 그녀는 모기소리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께 진심으로 죄송한게 한 가지 있어요. 문열공 매운당 이조년 선생은 사실은 운수면 출생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아전인수적인 못된 욕심이 있어서 그 분을 우리 고장에서 출생한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 어른은 1269년에 성주읍 용산리, 지금의 성주초등학교 자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도 성주로서 성주사람이 분명합니다. 그 어른은 어찌하다가 성주에 있던 생가를 잃고 고령군 운수면에 옮겨와서 십여 년을 살았을 뿐이랍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은 거짓말을 않는답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라고 유언을 했다. 그리고 그 보살님은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를 좋아했지만 아이도 못 낳는 그녀가 감히 나의 청혼을 받을 수가 없었노라고 하며 그녀도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일분일초도 나를 잊은 적이 없었다며 죽음을 앞둔 사람은 거짓말을 않는 고백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운수면 人마을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가 나에게 다정가를 읊어주었으니 그녀의 임종이 가까운 그때는 내가 그녀에게 다정가를 한번 읊어줄 수가 없겠느냐고 말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 보살의 마지막 소원을 풀어주지 못하겠는가?
나는 즉석에서 다정가를 읊어주었다.
드디어 내가 흐느끼며 다정가를 다 읊었을 때 곁에 서 있던 인자도 울고 초로에 접어든 보살님의 전처자녀 삼남매도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그들 계모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아예 대성통곡을 해버리는 게 아닌가.
내 사랑! 대가천 무흘구곡의 지령이 탄생시켜 준 보살님은 내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마치 무슨 드라마 같다고 인자가 말했지만 인생은 누구 할 것 없이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아닐까? 한수린 보살님의 유골을 부산 앞바다에 뿌릴 때 나도 그분의 골분 한줌을 뿌렸다.
최근 성주군의 민관중에서는 이조년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고 이조년 선생의 무덤이 고령군 운수면에 있기 때문에 그분의 출생지가 고령군 운수면이 아닐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어른의 출생지는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 지금의 성주초등학교 자리가 분명하고 본관도 틀림없는 성주(星州)이다.
하지만 그 어른의 출생지가 성주면 어떻고 고령이면 어떠하랴? 두 고을 모두가 대가천이란 젖줄기 하나를 빨고 살며 아득한 대가야 시대부터 오늘날 위대한 우리 대한민국 금수강산의 똑같은 백의민족의 아들딸인 것을…
대가천 무흘구곡의 똑같은 주인인 우리 성주, 김천, 고령 후손들이여 우리들 모두가 지금 만들고 있는 광장에 어느 날 모여서 웃는 얼굴로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라는 금쪽같은 선생의 문학을 다 같이 노래하고 찬미할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