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중요성은 구태여, 부모는 날 낳아 주시고 형제자매는 피를 나누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상의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천륜과 인륜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는 편의에 따라 바꿀 수도 있지만 천륜 인륜은 바꿀 수가 없다.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되다니! 외손자가 어찌 아들이 되는가.
인류 발전은 문물 제도의 변천으로 시작한다. 인류 문명도 예외는 아니다. 법도 도덕도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필요에 따라, 편의에 따라 그 기준도 변화한다. 그것이 인류 발전이며 역사의 발전이다. 변화해야 발전도 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 인류가 걸어온 길이라고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때로는 자연 발생적으로, 때로는 급진적 혁명의 방법으로 구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다 변화하고 타파해도 꼭 한 가지, 그럴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혈족질서(血族秩序)이다. 시대 발전에 따라 가족법 개정으로부터 양성평등, 모성승계, 종중의 개념, 1인 1적제, 성본 변경 등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정서적으로 미처 따라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동성동본의 혼인, 모성승계, 성본 변경이 법제화 될 때부터, 이러다간 전통 가족질서가 근본부터 와해되어 심하게는 이른바 `야합`이 횡행해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극단의 표현을 써가며 탄식을 하는 과격론자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시대가 변하는 것을…`, `제도 문물이 변화해야 인류 문명이 발전하는 것을…` 이라며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논자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다 변화해도 혈족질서 이것만은 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반대론자의 대명제이고 최후 보루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가족의 개체가 모여 가정이 되고 가정이 모여 국가의 모태가 되며 국가의 인적 구성은 한 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중요한 가정이 그 기본 질서마저 흔들린다면 국가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호주제도 없는 가정에 그래도 가정의 구심점은 `위계질서`라는 규범 하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한 부모 밑에 성이 다른 자녀들로 가족이 구성돼 있어 겉으로는 한 가정이라고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래서 가족 해체라는 말이 그리 낯설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산업화는 다원화를 부르고 다원화는 전래의 `가족`이라는 개념의 실종으로 이어져 더욱 가족 해체를 촉발시키고 말았다.
법제만으로 일가족(성 본이 다른 형제자매)이 되어 의(誼)좋은 가정을 이룰 수도 있고 피로 맺은 일가족보다 더 의로울 수도 있어 꼭 부정할 것만도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의좋게 지내는 것과 위계질서의 혼란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 이 글의 주제이다.
다 변화해도 혈족질서인 전통가족제도 붕괴는 안 된다
법원이 외손자를 양자로 입양하라고 판결했다 한다. 이 무슨 전통 가족 제도의 붕괴이며 혼돈인가.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 질서`의 민법 조항을 들지 않더라도 이는 용인할 수 없는 파행이다. 그 외손자의 복리가 전통 가족 질서보다 우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했다고 한다. 그 기준이 뭣인지는 모르지만, 한 자연인의 행복을 위해 만인에 적용할 법체계를 흔들고 혈족 질서를 허물어뜨린단 말인가. 이거야말로 재량권의 남용이며 전형적인 법관의 주관이 개입된 재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도 포퓰리즘의 산물인가?
오죽했으면 부모 자식 사이를 천륜이라 했겠는가. 천륜을 어겨가며 가계 질서를 흔든단 말인가. 양자를 들일 때는 제일 먼저 소목지서(昭穆之序 항렬)의 규정에 따라 가장 가까운 직계 방계 혈손을 찾았다. 그래도 없을 때는 적어도 항렬 질서를 파괴하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천륜을 거스를 참이면 차라리 입부혼인 제도의 취의를 살려 성 본을 유지하는 방법도 있지 않는가. 삼국시대와 고려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근친혼도 있었으며 오늘날의 문명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혼인 제도가 왕가에서 있어왔다고 문헌으로 고증하고 있다. 왕족이 그랬으니 일반 백성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에 와서 우생학적으로 근친혼의 폐해가 어떻다는 것은 다 아는 얘기지만 그 당시에는 심지어 상피제도 같은 것도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계 대(系代)의 승계 절차는 더욱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나 있을 법한 일을 오늘의 문명사회에서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간혹 민감한 정치적 사건도 그렇고 오늘의 시대적 가족 분화에 따른 세대 간의 대립에도, 사회 윤리적 도덕관 확립을 위한 행형제도에도 법원 판결이 일반의 법 감정과는 다르게 결과가 나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론이 분분할 때마다 언필칭, 글로벌 시대이고 또 다문화가 대세를 이루는데 까짓 전래의 혈족 개념을 고수하고 고루한 주장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고 하며 시대 변천에 따라 사고도 좀 유연하게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실론자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 생활의 질서와 복리를 위한 엄정한 룰이라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에 하는 주장이며 시대의 변천이나 제도 문물의 변화와 개혁에 따라 결코 가변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최소한 혈족의 개념은 변화할 수 없는 것이 하나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천륜을 거스르다니 천부당만부당이다.
지난날 우리는 종계변무라는 희한한 사건도 겪었다. 명나라 대명회전에 조선 이태조가 고려 말의 명신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돼 있었던 것을 올바로 정정했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 외손자가 아들이 되는 판결을 보고 현대판 종계변무 사건이라고 원용을 해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유사한 사건이 있어도 모두 기각되거나 원천적으로 가족 질서를 흐트리는 판결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판례가 되어 더욱 혼란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여 앞으로 올 혼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법조계의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론으로 말하여 가족의 구성원 간은 `가계질서`가 기본이며 구성 원리이다. 가계 질서로부터 출발한다. 이를 무시하고는 친척도 인척도 관계가 모호해짐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이런 혼란을 왜 자초하려 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