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싱그러운 여름도 지나고 온 산을 붉게 물들였던 단풍마저 다 떨어져 바람만이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한 해의 저물녘이다. 창밖의 바람 소리가 오늘따라 스산하기만 하다.
자동차의 소음이 뜸해지고 가로등만이 외롭고 희미하게 비치는 적막한 밤에 그래도 살맛나는 소식을 기대하며 자정 뉴스에 귀를 기울인다. 이혼율이 급증한다는 보도에 세태를 탓하며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부부의 묘하고 숙명적인 인연을 생각해 본다.
정말 우연하게 삼종고모의 아들인 C군을 만나 미아리에 위치한 그 집에 놀러갔다가 건넌방에서 놀고 있는 그 집안 딸네들을 문틈으로 엿본 것이 아내와의 첫 대면이었다. 그날 모인 네 명의 처녀들 중 아내는 유독 나의 눈을 황홀하게 했으며 나의 반려자란 영감을 느꼈다.
그러나 여러 문제를 들어 집안 어른들은 완강히 반대했다. 남자에게 일생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은 좋은 아내를 선택하는 것이다. 인연과 해후에 소홀했던 나의 삶이지만 아내를 선택한 나의 고집과 주장만큼은 언제 생각해도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그런데 이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아들 4형제 짝지어 보내고 덩그렇게 둘 뿐이다. 서로 노년의 외로움을 달래고, 지난날의 모자라고 잘못된 점을 채우고 가지런히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별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생각하니 불현듯 설명할 길 없는 아픔이 가슴을 저며 온다.
아내는 나보다 세 살 아래다. 죽음은 연령순이 아니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보다 최소한 3년 늦게 죽는 것이 공평한 것이라 이야기하면 "당신은 할 일이 많은데, 나 보다 오래 살아야 된다"며 "무슨 얼토당토 않는 뚱딴지 같은 계산이냐"고 정색을 하며 핀잔을 준다. 지난 날엔 아내가 남편 손에 묻히는 것을 복으로 알았지만, 요즈음은 나이 들면 남편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물건 취급하는지 노년의 이혼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남남으로 만나 인고(忍苦)하며 40여 년의 세월을 헤쳐오면서 수명마저 양보할 만큼 나를 감싸고 이끌어 준 아내가 새삼 고맙고 자랑스러워 뿌듯한 행복감에 취한다.
며칠 전 반상회에 다녀온 아내가 고조된 억양으로 얘기를 풀어놓았다. 3개월 전에 부인이 농장에 감을 수확하러 갔다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추락사한 60대 중반의 901호집 남편이 기다렸다는 듯 40대의 젊은 아내를 맞이한 사실이 그날 반상회의 주제가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참석한 부인네들이 하나같이 자기 일처럼 분개하더라는 얘기를 전하는 아내의 목소리도 분노에 젖어 있었다. 짐짓 나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는 계산이 깔려 있구나 생각하면서 "그 사람 너무 급하게 서둘렀구먼"하며 웃어 넘겼다. 하지만, 결국 남자란 50보 100보란 생각에 고회(告悔)하고 마음을 다져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체념한 듯 달관한 듯 무표정하게 어머니의 시신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정보다 법으로 살아오신 60년이었지만, 그때 나는 아버지의 무표정에서 눈물이나 통곡보다 더 진하고 애절한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에 물이든 환경에서 자랐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으며, 젊은 시절 "남자의 일생 중 가장 좋은 날은 결혼하는 날과 자기 아내를 매장하는 날"이란 하이포넥스의 말로 거리낌 없이 아내를 약 올리고 남자의 우월적인 지위를 과시했던 언동(言動)이 새삼 나를 부끄럽게 한다.
순서대로 진정 아내가 나보다 오래 살기를 바란다. 죽은 사람을 두고 `돌아갔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을 바로 `인생은 나그네`란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순서대로 내가 먼저 죽으면 몇 년이 될지 외롭고 쓸쓸하게 나그네 길을 홀로 걸어야 할 아내에게 나름대로 배려와 준비를 아끼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도록 운전도 가르치고 컴퓨터도 다룰 수 있도록 했다. 자식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당당하게 살라고 아파트도 아내 명의로 해놓았다. 이제부터는 자신을 위해서 살라고 당부 하지만, 희생과 헌신의 보람에 고생을 기쁨으로 감내하며 살아 온 바보스러운 사람이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근심하는 것 중에서는 죽음 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고, 소중히 여기는 것 중에서는 삶보다 더 한 것은 없다. 지칠 줄 모르고 사라질 줄 모르고 언제나 즐겁고 따뜻하고 변치 않는 사랑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다. 실로 우리 인간은 허망하면서도 당연한 무상의 세계를 살고 있다. 때문에 아무리 기막힌 사랑에도 끝이 있고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외롭고 험하고 고된 인생 여로에 아내와 같은 동반자를 만나 손가락 걸면서 평생을 헤쳐왔다는 것이 나에겐 더 없는 행복이요 축복이다.
저마다 잘난 체 날뛰는 판에 홀로 정신적인 깊이를 간직했으며, 내면에 왕비와 같은 고귀함과 백조와 같은 순결함을 지닌 여자다. 그 고귀함과 순결함이 성숙하지 못한 정신의 소유자인 나를 참되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었다. 건강하고 착하고 보살같이 어진 아내를 눈앞에 두고 엉뚱하게도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생각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나이가 미워진다.
언젠가는 내려놓아 하는 진귀한 보옥을 쥐고 바라보듯 아쉬움에 젖어있는 나의 눈길에서 아내는 무엇을 느꼈는지 멋쩍은 웃음으로 대꾸한다. 허긴 삶 자체가 죽음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담담하게 넘어가 보지만 왠지 가슴속에선 휑하니 바람이 인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던가. 긴장과 슬픔과 애환 속에서도 조그마한 소망의 성취를 맛보았으며, 채워지지 않는 허기증 같은 목마름 속에서도 몇 방울의 감로수로 혀끝을 적시면서 두 사람 한마음 되어 희열에 빠지기도 했지만 끝내 갈 길은 각각이다.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거늘 사람들은 망령되게 있다고 한다.(生死本無 忘計爲有)"는 보조국사 지눌의 법어를 반추해 보지만, 머리로 어림짐작만 해 볼 뿐 나와 같은 범부에겐 여전히 안개 속이다.
임종을 앞두고 자녀들이 애통해 하며 울자 "방정맞다"고 꾸짖었다는 어느 분의 임종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피할 수 없는 아내와의 이별을 의연하고 멋있게 맞이하리라. 일생 중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멋있는 이별 말이다.
당연한 순서대로 아내보다 내가 먼저 죽음을 맞이한다면 더 없는 행복이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감사하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작별하리라. 그리고 애통해하는 울음보다는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장송곡을 듣고 싶다. 그리하여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의 장을 만들게 되길 바란다.
생각만 해도 두렵지만 만약 나보다 아내가 먼저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해 본다. 지극한 이별의 아픔을 가슴속에 채워 놓고 그 슬픔을 정성으로 승화시켜 슬프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이별을 하리라. 내 손으로 시신을 목욕시키고, 수의를 입혀 단장시키고, 일곱 마디 묶음은 하지 않고 고이 관속에 눕히리라. 하고픈 넋두리는 실타래에 감아 놓은 채 "고마웠소, 즐거웠소, 미안하오" 이 세 마디 작별의 인사를 하리라. 그리고 저승에서도 나를 기다려 달라는 그런 당부는 부끄럽고 염치없어 나 혼자만의 소망으로 묻어 두리라. 그것이 진정 아내를 위한 배려요 성의라고 생각하니, 언젠가는 닥쳐올 아름답고 슬픈 이별이 두렵기만 하다. (2006. 9.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