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아들을 예비 사단에 입영시키고 돌아오는 길, 공허한 마음을 뚫고 떠오르는 추억이 있었다. 30여 년 전 콩나물시루 같은 열차에 매달려 낯선 곳 영주까지 가서 입대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듯 자식이 입대한다니 갖가지 망상에 빠진다. 자식이 성장하여 국방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영했다는 것은 마냥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야함에도 끈끈한 천륜의 정에 집착하여 헤어나지 못하는 나의 소심한 마음가짐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더욱이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전시도 아니지 않는가. 제 딴에는 부모의 심기를 해칠까 염려하여 통제된 단체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부모 곁을 떠나는 불안하고 서운한 감정을 숨기려고 웃음을 띠며 당당하게 사단 정문으로 들어가는 자식 놈. 그 아이를 보며 안경 속의 눈물을 훔치던 아내가 돌아오는 차안에서 침묵에 빠져있는 내게, "어머님께선 하나뿐인 당신을 군에 보내면서 심정이 어떠했겠어요."라고 운을 뗐다. 불현듯 30여 년 전 내가 군에 입대할 그때의 어머니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아내의 자문자답하는 듯한 독백에 나도 모르게 자식은 애물이라는 생각과 함께 자식은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불효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느꼈다. 6·25동란이 발발하여 이웃과 집안의 젊은이들이 군에 끌려가는 것을 보시고 "네가 커서도 군대에 가는 세상이면 말세지." 하시던 어머니의 바람과 기원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입대하기 전날 밤,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여 흐느끼시던 어머니의 눈물과, 무뚝뚝하고 굳센 줄만 알았던 아버지께서 대구역 개찰구에서 나를 배웅할 때 당신의 눈망울 속에 서려있던 그 눈물은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그대로 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10년, 아버지께서 서세하신 지 6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나의 자식을 군에 보내고 새삼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보자니 문득 어느 책에서 본 부모 기러기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린 새끼 기러기를 나누어 등에 업고 하늘을 날던 부부 기러기가 자신이 늙어서 더 이상 날개죽지를 펼쳐 날 수가 없게 되면 `엄마를 업고 하늘 위를 날아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그러나 새끼 기러기는 단호하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뜻밖의 대답에 당황한 기러기가 배은망덕한 새끼 기러기를 향한 분노를 누르며 그 이유를 물었다. 새끼 기러기는 당연한 이유도 모르는 부모 기러기가 측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부모 기러기가 날 수 없는 그때가 되면 주렁주렁 딸린 제 새끼 업어 주고 먹이느라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아빠 엄마를 업어 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무런 대꾸도 항변도 할 수 없었던 기러기의 궁색한 아픔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 부모 대신 손자, 손녀 기러기를 업고 나는 새끼 기러기의 대견한 모습에서 이 세상의 부모들은 삶의 보람과 희열을 느낄 것이다. 부모보다 참되고 용기 있고 성실하고 건강하고 재력있고 명예도 누리고 모든 것을 능가하는 승어부의 기대가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의 공통된 소망이요 부모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입대할 당시 부모님의 심정을 절실하게 헤아리지 못했듯이, 내 자식놈도 우리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란 입장의 차이가 이렇게도 엄청난 것일까? 자식은 부모가 되고 부모는 또한 자식이 된다는 사실에서 보면 등가가 성립되지만, 부모를 섬기는 이야기는 없어도 손자, 손녀를 키우는 재미와 사랑스러움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며 법석을 떠는 사람은 많다. 부모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인식하면서 자식은 보물로 생각한다. 아래로의 보살핌은 지극하면서, 위로의 섬김은 소홀하다.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도록 받기만 하고, 하잘 것 없는 것을 드리는 것에도 인색하며 생색을 내려고 한다. 산고의 아픔을 감내하고 양육하느라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하며, 행여 그릇된 길로 들어설까 마음을 조이며 자나깨나 자식 걱정에 가슴 속은 숯덩이가 되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자식보다 괴로운 존재는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의 부모들에게 자식보다 소중하고 보배스러운 존재는 없다. 자식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을 기쁨과 보람으로 승화시키는 지혜에 우리는 익숙하다. 간혹 생각이 모자라는 부모가 자식은 애물이니 원수니 표현을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역설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도 자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위한 위로의 말에 불과할 뿐이다. 자식 두 놈이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다. 자주 편지하라는 부모의 당부는 흘려버리고 아쉬운 일이 있을 때만 전화로 용무를 끝낸다.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그러나 어버이날이나 우리 내외의 생일에 간절한 몇 마디 문구를 엮어 보내는 전보 쪽지 한 장에 괘씸하고 섭섭하던 마음은 간데없고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마음만 일어 우리 내외는 기쁨과 보람에 들뜬다. 자식의 하잘 것 없는 사소한 배려에도 부모는 기쁨에 취한다. 옛말에 자신이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의 심정을 안다고 했다. 이해와 설득만으로는 참모습을 알 수 없는 지고지순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식은 무엇이며 부모는 무엇인가? 부모는 나를 낳아 주셨고 내가 낳은 존재가 자식이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로서 보살핌과 자식으로서 섬김의 도리를 행함에 있어 아래로만 일방통행 하는 어리석음을 자행하고 있다. 순교자적인 부모의 사랑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보답할 길이 없이 크고 무거운 부모님의 은혜는 망각한 채 살아왔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직 자식이 건강하고 올바르고 훌륭하게 성장하여 오붓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기원, 그것뿐인 부모의 사랑을 우리는 무슨 엄청난 대가를 바라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오늘날 산업사회를 맞이하여 물질만능의 사고와 이기적인 생활방식은 자식 사랑까지도 물질로 대신하려는 어리석은 부모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세상의 자녀들에게 지고지순한 부모님의 사랑보다 필요한 명약은 없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문제, 노인 문제 등 사회의 모든 문제가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저버리고 자식 사랑이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은데서 오는 혼돈과 배신의 결과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이다. 가정에서 섬김과 다스림이 올바르게 되지 않았던 결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어른 앞에서 자식을 애무하거나 사랑의 표현을 자제하라 하시던 어른들의 말씀에 깊은 뜻이 있음을 이제야 어렴풋이 짐작으로 알 것 같다.(1989. 5. 10)
최종편집:2025-05-20 오전 09:30:12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페이스북포스트인스타제보
PDF 지면보기
오늘 주간 월간
출향인소식
제호 : 성주신문주소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3길 15 사업자등록번호 : 510-81-11658 등록(발행)일자 : 2002년 1월 4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성고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45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성고e-mail : sjnews1@naver.com
Tel : 054-933-5675 팩스 : 054-933-3161
Copyright 성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