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 순서 □ 이제 문화 산업이 대세다 □ 유일무이! 성주 생 활 사 문화 □ 문화콘텐츠 발굴에 나선 지자체들 □ 생활사 문화에서 미래 희망을 엿보다 별천지 성주는 세종대왕자태실(生), 한개마을(活), 성산동고분군(死) 등으로 대표되는 탄생에서 삶, 죽음을 아우르는 생활사 문화의 고장이다. 세종대왕자태실은 동양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문화인 생명(生) 탄생의 힘과 신비가 담겨있고, 전통 민속마을인 한개마을은 생활(活)의 정취가, 성산동고분군은 죽음(死)의 영역이 내포돼 있다. 이 세 영역을 더한 인간의 일생을 아우르는 생활사 문화야말로 타 지역과는 차별화 된 우리만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다. 문화는 그 지역을 말할 수 있는 매개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독특한 문화는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는 문화콘텐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제 성주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자산을 콘텐츠라는 제품으로 만들어 내 국내외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특화된 포지셔닝을 구축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 때다. 돌파구의 핵심에 생활사 문화가 있다. ◆조선조 생명문화의 원류 예향 星州의 자랑 `세종대왕자태실` 성주는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예향이자 백두대간의 웅혼한 기상이 감도는 반도의 길지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태실이 집중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문화적 보고다. 세종 20년(1438년)에서 24년(1442년) 사이에 만들어진 `세종대왕자태실`은 세종대왕의 적서 18왕자 중 문종을 제외한 17왕자와 원손인 단종의 태가 갈무리돼 있다. 이로 인해 별고을이 목(牧)으로 승격되고 웅군(雄郡)의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경상남·북도를 합쳐서 고을 주(州)자가 들어 간 곳이 경주, 진주, 상주, 복주(안동)와 우리 고을뿐이니 성주는 태(胎)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고장은 군세가 줄어들고 있으니 안타까운 실정이다. 우리의 문화자산 중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뛰어난 문화유산이 태실이다. 전국에서 많은 태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곳이 없으며 그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는 곳도 우리 성주뿐이다. 대개의 태실은 한 두기 정도에 지나지 않고 전국에 있는 왕들의 태실은 1928년에 이왕직(李王職)에서 모두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봉했고, 나머지 부분은 민간인에게 넘겨주거나 아니면 땅을 파고 묻어버렸고, 더 심한 것은 태실의 석물들을 개인의 묘소에 사용하고 깨어버려 그 흔적조차 없는 곳이 많다. 국내 유일의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세종대왕자태실은 2003년 3월 6일 국가사적 제444호로 지정됐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우리처럼 태를 길지를 찾아 갈무리하는 민족은 없다. 중국에서 시작됐다고는 하나 중국은 우리처럼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자취가 남은 곳이 없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태실이 온전하게 현존하는 곳은 우리 성주만의 자랑이다. 특히 조선의 명군인 세종대왕의 왕자태실이 이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왕실의 번성뿐만이 아니라 성주가 빼어난 산수와 기개를 갖추고 있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성주는 태 문화를 계승·발전시켜 가장 인간다운 인간, 세계에서 가장 인본정신이 발달한 고장이라는 점을 자랑하는데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주군은 지난 2008년부터 세종대왕자태실 생명문화공원 조성사업을 활발하게 추진 중이다. 문화재의 체계적 보존과 관리를 기본으로 하면서 상징적 의미인 생명존중의 전통을 살린 생명문화공원을 조성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2013년까지 6년간 총 117억원(국비 45, 도비 21, 군비 51억원)을 투입해 생명문화관 건립, 생명문화광장 조성, 세종대왕자태실 정비, 등산로 정비, 주차장 신설, 진입로 정비 등을 실시한다. 생명의 성지로서 각종 시설 설치와 교육 프로그램, 다양한 이벤트로 관광객을 유인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인근 한개마을과 성산동고분군을 활용한 연계관광지로 그 기대가 크다. ------------------------------------ ◆600여년의 역사 속에서 전통문화가 생활에 녹아든 `한개마을` 배산임수에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서 600여년의 역사를 쌓아온 곳이 바로 월항면 대산리의 `한개마을`이다. 성산이씨(星山李氏) 집성촌인 이 마을은 조선 세종조에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낸 이우(李友)가 정착하여 터를 잡은 이래 이양(李陽), 이정현(李廷賢), 이수성(李壽星)으로 이어지면서 양반마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600여년의 문화와 전통이 잘 전승·보존돼 민속자료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12월 31일부로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족자료 제255호로 지정됐다. 이 마을에서는 광해군조 이후 9명의 대과와 24명의 소과 합격자를 낼 정도로 호학의 기풍이 진작됐으며, 응와 이원조·한주 이진상 등의 이름난 유학자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계 이승희 등의 인물을 배출해냈다. 또한 마을의 전통한옥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토석담이 잘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마을의 동선을 유도하면서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잘 동화되어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은 마을이다.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예전에 이곳에 큰 나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한다. 즉 한개라는 이름은 큰 개울 또는 큰 나루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뒷산인 영취산(해발 322m) 줄기가 마을을 감싸듯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내리고, 마을 앞에는 백천이 흐르고 있어서 영남 제일의 길지를 이루고 있다. 현재 한개마을에는 약 60여채의 가옥이 있으며, 마을 앞쪽을 중심으로 더러 변형되거나 새로 지은 양옥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또 집들은 보존이나 관리가 양호한 집들도 있는가 하면 군데군데 허물어졌거나 퇴락한 집들도 있고 더러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도 있다. 한개마을은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던 훈련원 주부 이석문이 터를 잡았던 곳으로 사도세자 참사 후 영조 50년(1774년) 세자를 사모해 사립문을 북쪽으로 내고 평생을 은거한 충절이 깃든 북비고택(경북민속자료 제44호)을 위시해서 다수의 지정문화재를 찾을 수 있다. 북비고택과 교리댁(경북민속자료 제43호), 한주종택(경북민속자료 제45호), 하회댁(경북문화재자료 제326호) 등은 모두 1700년대 후반기에 지어졌으며, 진사댁(경북민속자료 제124호)과 극와고택(경북문화재자료 제353호)은 1800년대에 지어졌고, 월곡댁(경북민속자료 제46호)은 1900년대에 건립됐다.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도동댁(경북민속자료 제132호)과 첨경재(경북문화재자료 제461호)가 있으며, 등록문화재 제261호인 옛 담도 주목할 만하다. 군은 사람과 문화, 생활과 자연이 공존하는 민속마을로 조성, 주목받는 문화유산 자원으로 관리·육성코자 한개민속마을 정비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2009년부터 2016년까지 453억5천200만원(국비 317, 도비 40, 군비 95억원)을 투입해 오랜 세월 속에서 변형·퇴락된 가옥을 정비해 마을 형성시기인 조선시대로 복원 중이다. 또한 주차장, 마을 안길 정비, 화장실 등 관광객 편의시설을 설치해 전통문화와 주민이 공존하는 전통마을로 발전시켜 나갈 전망이다. 내년에도 가옥 정비와 함께 전기와 통신 등의 지중화사업과 소방방재사업 등이 예정돼 있다. ------------------------------------ ◆인간의 일생을 아우르는 死도 史가 되어 묻힌 `성산동고분군` 죽음 역사 성산가야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의 흔적이 세월 속에 축적된 것이 성주문화의 특징으로, 국가 사적 제86호로 지정된 `성산동고분군`을 통해 성주가 성산가야의 고도(古都, 옛 도읍)임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인 1918년에 일본인 학자들이 3기를 발굴해 처음으로 그 내용이 공개되고 이후에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이 더 있었으나 부분적인 발굴에 그치는 등 저조했다. 광복 후 한동안 조사가 없다가 1986년 계명대학교박물관이 가야고분 연구의 일환으로 체계적인 발굴을 하면서 성산동고분군의 구조와 특징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찾게 됐다. 성산동고분군은 대성산(해발 425m)의 동쪽 줄기인 자산(해발 389m)의 사방 능선에 분포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성주읍 성산리 일대다. 이 중 대형분들은 성주읍내가 잘 보이는 서북능선의 산마루와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예로 볼 때 성산동고분군에서 중대형묘의 봉토는 직경이 10∼20m 정도이다. 봉토 내부에는 수혈식으로 축조한 주곽과 부곽이 배치되어 있으며, 별도의 순장곽이 추가된 경우도 있다. 이 중 주곽은 할석(割席)과 판석(板石)으로 축조한 두 종류가 조사됐다. 고분 내부에서는 금귀걸이를 비롯해 은제장신구, 활촉, 철모, 토기호리병 등 1천350점 정도의 유물이 출토됐는데, 이 중 토기류가 대다수로 금속류는 빈약한 편이다. 출토된 토기의 성격은 지역적으로 가깝고 정치·문화적으로도 강력하고 광범위한 고령의 대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낙동강 건너 멀리 떨어진 대구·경주의 영향을 받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대구·경주의 범 신라토기 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세부적으로는 뚜렷이 구분돼 `성주양식`이라 할 만큼 지역적 독자성을 띠고 있다. 이와 같이 성주의 토기문화는 신라적인 요소, 가야적인 요소, 성주 지역의 독특한 요소 등이 복합돼 있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군은 가야시대 만들어진 무덤인 성산동고분군을 사적공원화해 문화유적 보존은 물론 생활사 문화의 관광자원화를 도모하고 있다. 2009년부터 오는 2012년까지 194억원을 투입해 역사관 건립을 추진 중으로, 현재까지 129기가 확인돼 이 중 34기에 대한 정비 및 복원 그리고 진입로 개설을 완료해 내년 3월경 역사박물관 공사를 발주할 계획이다. ------------------------------------ 고유의 문화콘텐츠 개발에 몰두해야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라지만 아직은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성주를 대표하는 것은 단연 참외로, 성주는 몰라도 ‘참외의 고장 성주’는 알아듣는 것이 현실이다. 성주참외의 브랜드가치는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참외를 활용한 상설판매장을 설치하고 생산현장 체험 등을 실시한다면 좋은 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더욱 자랑할 만한 유산은 ‘생활사 문화’라고 목소리 높이고 있다. 성주를 벗어나서는 인지도가 약한 생활사 문화를 널리 알릴 문화콘텐츠 개발이 시급한 실정이다. 최근 성주군의 적극적인 홍보로 2006년 이후 외부 방문객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문화와 관광이 밀접하게 연결되며 `문화콘텐츠 관광`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관광객들은 이제 단순히 경치를 구경하고 쇼핑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스토리텔링이 있는 관광상품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성주 고유의 콘텐츠를 개발해 관광과 문화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취재 1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최종편집:2025-05-20 오전 09: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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