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온난화 탓인지 지난 여름 더위는 참 지겹게 지나갔다. 정작 한여름에는 비다운 비도 오지 않더니 9월에 들어서서야 태풍에다 폭우마저 쏟아졌다. 시간당 강수량이 130 여년만에 최고라고 했다. 그래서 수도 서울 심장부라 할 광화문 주변이 침수 난리를 겪고 만 것이다. 일기 예보도 맞지 않았다. 하긴 1일 예보도 틀리기 일쑤인데 주간 예보가 맞길 기대할 수나 있을까만 9월 초인가 4∼5일은 비가 없을 거라고 예보해, 김장용 고춧가루 준비를 위해 생고추를 사서 말리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반 숨이 죽으면 볕에 말리기로 하고 베란다로, 방으로, 거실로 널어놓으니 온통 고추판이었다. 베란다에는 선풍기를 동원하고 방, 거실은 보일러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비는 주구장창 내리는데 예보만 예의주시하는 지루한 10여일이 지났다. 그 곱던 고추가 마치 어루러기 환자처럼 거무죽죽하기도 하고 누르딩딩으로 변색하는 것이었다. 실에 꿰어 매단 것은 무슨 알밤이라도 되는 듯이 투둑투둑 소리 내며 떨어지는 것이었다. 단두대도 아닌데 꿰맨 실에 목만 붙어있고 몸뚱이만 바닥에 `나 죽어` 하고 벌렁 누워버렸다. 밤낮으로 낙오자 처리도 지겨웠다. 한 달여를 지나고 나니 고추는 웬만큼 말랐으나 성한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보다는 성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덜 상한 것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래도 버리기 아까워 좀 성한 것은 가위질 해가며 골라내었다. 거무죽죽 마른 것은 어김없이 속이 곰팡이가 피었고, 누르딩딩은 새카맣게 썩어 있었다. 반쪽이라도 건질까 하고 자르다 보면 통째 버리기가 일쑤였고 그래서 내가 뱉은 말 "썩어도 썩어도 이렇게 썩을 수가 있나"가 절로 나왔다. 교육방송 인기강사가 전임 두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 2위에 오른 여론 조사를 보고 했다는 말("우리 국민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가장 존경한다네. 참 썩어도 썩어도 이렇게 썩은 줄 몰랐다")이 떠올랐다. 혹시 그와 내가 `지적소유권` 분쟁에 휘말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 지금 농산물은 잘 변질하고 부패한다. 그것은 자연에만 맡겨 놨을 때와 다르게 생장 촉진제와 착색제를 쓰고 소비자 기호에 맞추는 재배이기 때문일 것이다. 금이야 옥이야 시설에서 키운 농작물이 풍상을 온 몸으로 다 겪으며 자란 농작물과 어찌 비교가 될 것인가. 마치 온상의 화초를 대지의 화초와 비교하는 꼴이라 할까? 고추만 하더라도 우리들 농사지을 때는 수확해서 비만 맞히지 않으면 그렇게 썩지 않았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에 위대한 가르침이 있음을 경고하는 것 같았다. 고추 부패 사건, 이건 누구 탓일까? 순전히 기상청 탓이다. 최고 60㎜라 예보했는데 300㎜가 쏟아졌으니 이런 기상청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려는 것이다. 예보의 정확도를 기하기 위해 550억원짜리 수퍼컴퓨터도 미국서 사다 놨고, 작년 7월에는 대통령보다 연봉이 많은 기상전문가 외국인을 영입했는데도 오보가 나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적중률도 오늘날과 같지 않았고 최첨단 과학기재라는 말도 없었을 때, 하도 잘 맞지 않으니까 "정확한 것은 내일 알려 드리겠습니다"라는 코미디의 한 소재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지 않는가. 당국자는 돌발기상이라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그런데 마르며 썩히며 버리기도 한 고추가 멀쩡하게 잘 생기긴 했지만 매운 맛이 하나도 없었다. 고추라면 매워야 하고, 아주 맵거나 조금 덜 매울 수도 있어야 하는데 이건 무슨 피망 같았다. 좀 맵다는 것도 겨우 꼭지부분에 손톱 길이만큼만 매울 뿐이었다. 이 나이 되도록 그런 고추는 처음 본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때는 형상도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이 빛깔도 붉다 못해 검은 빛이 났었는데 지금은 형상부터가 강렬한 맛도 없고 색깔도 불그레한 것이 꼭 억지로 물이 든 것 같았다. 꼭 비유하자면, 한참 전의 어느 정권에서는 야당을 급조했는데 이를 두고 정체성도 없는 순치(馴致)된 야당이라고 했던 것이라고나 할까. 상인들은 손님이 `이거 매운 것이냐`고 물으면 맵다고 하고 `안 매운 것이냐`고 물으면 안 맵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속성인데, 순진한 아내는 `이거 매운 것이죠?` 했더니 맵다고 해서 샀다는 것이다. 그런 것 곧이곧대로 정직하게 대답할 상인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며 아내만 타박하고 말았다. 맵거나 말거나, 영양이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고 오로지 색깔 곱고 수량에만 매달리는 생산자가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참외나 수박처럼 즉석에서 당도를 측정하듯 고추도 `맛과 맵기`를 측정할 수 있고 그 흔한 인증제도라도 실시했으면 좋겠다. 틀린 예보로 고추 다 망친 것, 오이맛 같은 고추를 맵다고 판 상인과 생산자를 지상에 고발하고자 한다. 내가 봐도 참 황당한 고발 사건이다.
최종편집:2025-05-20 오전 09: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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