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대접의 폐단
집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미풍양속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큰 폐단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술은 손님 접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기에 이를 가정에서 준비해야 하는 가정주부, 특히 가난한 집안의 주부들에게는 그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실학파의 학자 정약용은 목민심서의 조에서 향연의 예법을 분수에 맞게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여러 가지 폐단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이는 빈객의 예의가 얼마나 생활의 형편을 억압하고 있었던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특히 형식과 겉치레의 사치스러움을 좋아 하는 민족이었던 만큼 이 점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술대접에 따른 폐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한 가난한 선비의 집에 손님이 오자 그 아낙은 술을 살 돈이 없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술을 사오다 그만 돌에 걸려 넘어져 술을 엎지르고 말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울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그리 슬피 우는 까닭을 물으니, 머리카락을 잘라 술을 사오다 엎질러 버렸는데 내 머리카락을 자른 것은 아깝지 않으나 술을 엎질러 손님을 대접하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워 운다고 했다 한다.
이 이야기는 손님에게 대접을 하기 위하여 술을 마련하는 것이 주부들에게 얼마나 강박관념을 주었던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손님 접대에 따른 폐단을 풍자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박두세란 사람의 에는 조선 후기에 충청도에서 있었던 사회풍속을 만화경으로 비판한 글이 실려 있다. 여기에 보면 손님 접대의 식단을 세 등급으로 만들어 놓고, 손님이 오면 주인이 손을 얼굴에 대어 대접에 차이를 두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곧 손으로 턱을 만지면 가장 조잡한 상차림으로 내고, 코를 만지면 중간 상차림을, 이마를 만지면 가장 좋은 상차림을 내고 있었는데 이를 눈치 챈 동리사람이 주인의 손을 자꾸 이마 부분으로 올리게 하여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또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수염의 어디를 쓰다듬는가를 보아 상차림의 경중을 판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이 시대에도 이미 손님 대접이 항상 어려운 예의의 문제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술 빚기와 주부
고래로 소급해 보면 술은 제례에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제례를 주재하던 여사제, 곧 무당이 만들고 마셨다고 한다. 여사제가 술을 빚게 된 것은 그가 제의의 주재자로서 인간세계와 신령세계를 중계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쌀을 씹어 원시적인 술을 빚었던 데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유래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조상들은 집에서 술을 빚는 일은 집안에서 가정을 관리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주부에게 그 권 한과 임무를 부여하여 왔다. 그래서 옛 부녀자들은 술을 빚는 데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것은 가정에서 빚는 술은 집안의 어른이나 집에 오는 손님에게 대접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술맛이 좋은 술을 만들어야 하겠지만, 술맛이 시고 나쁘면 집안에 액운이 생긴다는 믿음으로 인해 그에 따른 원망을 고스란히 혼자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집의 술맛은 그 여주인의 솜씨와 그 집안의 분위기가 우러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제사에 쓸 술이 시어지거나 잘못되면 조상에 대하여 불경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가혹한 시집살이의 구실이 되었고, 결혼하는 자녀들의 혼사에 쓸 술이 잘못되면 자녀들의 장래가 불행해질 것으로 여겨 주부들은 술을 빚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주부들의 정신적 고통은 매우 컸고 술 빚는 일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이다.
술을 빚는 것이 주부의 권한이었기 때문에 술을 거를 때 처음으로 술맛을 보는 것도 주부의 권한이었다. 그리고 제삿술을 술독에서 퍼낼 때도 반드시 주부가 퍼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로 보면 주부는 술맛이 좋은지 나쁜지 감별할 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술을 자주 마셔 본 경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한도에서 주부는 더러 술을 마셔 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옛날 관청의 식모 노릇을 하는 다모들은 한 자리에서 막걸리 세 사발을 단숨에 들이마셔야 자격이 부여됐다는 말도 이런 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