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입학, 취업 등 새로운 조직이나 단체에 몸담을 때마다 신상 파악을 위한 서식에는 종교를 묻는 항목이 있었다. 나는 그 물음에 대하여 명쾌하게 기재하지 못하고 점 하나 찍고 여백으로 남겨 놓았는데, 그때마다 곤혹스럽고 야릇한 거부감에 휩싸였다. 불교나 기독교 같은 특정 종교는 갖고 있지 않지만, 나름대로 명명한 조상교의 독실한 신자임에도 공식적으로 기재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유가에서 성장한 탓에 예수교나 불교의 가르침이나 교리에 접근할 기회는 없었다.
우리 동네 뒷산에는 신라 애장왕 때 왕자의 눈병을 치료한 석간수의 효험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감응사란 조그마한 암자가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칠월칠석날과 사월초파일에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 본 적은 있었지만 나는 부처님께 합장하고 절한 기억은 없다. 어머니께서도 종교적인 신앙에서라기보다 기복의 장소로 생각하신 것 같다. 나도 이웃집 놀러 다니듯 무심하게 드나들면서 절 뒤 언덕 바위 사이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겨우 틈새만 보이는 좁은 굴속을 공포에 떨면서 기웃거리며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황당한 의문에 빠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 들은 서산대사나 사명당 같은 도술 부리는 고승의 이야기 이후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이 끼일 손가(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란 6조 혜능대사의 돈오한 법어를 접한 것이 불교에 대해 생각을 한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예수교는 조상 제사도 모시지 않는 종교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 왔기에 주손인 내가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교로 알았다. 그래서 성탄절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외쳐대며 가짜 성가대 행세도 해 보았고, 6.25사변이 휴전하던 그 해에 우리 동네에 예배당을 만들려는 전도사 아주머니를 괴롭혀 고발당하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철학 교수님의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에 대한 열정적인 강의에 심취되어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갈망에 허덕이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도 간절한 염원으로만 유보되어 있다. 그 후 군에 입대하면서 서양을 알려면 성경을 알아야 된다는 지적 호기심에서 성경을 탐독하기도 했다.
종교의 어원은 조각나고 흩어진 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란 뜻이다. 즉 사랑, 자비, 희생, 평화, 화합, 조화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희구하는 이상이요 최고의 가치다.
그러나 내 눈에 비쳐진 현실의 종교는 순수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맹목적인 앎과 믿음, 맹목적인 행동은 광신을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고,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다. 종교 자체보다는 종교와 절대자를 빙자해서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고 돈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하여 믿음을 가탁하는 현 실상을 보고 들을 때마다 종교에 귀의하여 영혼의 구원을 받으며 살고 싶은 바람은 산산조각 나기 일쑤다.
극단적인 이기심에 빠져 아귀다툼을 벌이며 인간다움을 상실해 가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를 통해 부단한 자기 성찰의 계기를 가짐으로써 충만하고,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가꿀 수 있다는 것에 종교의 일차적인 의미를 두고 싶다. 천당과 지옥의 판단은 결코 절대자의 전권은 아니다. 현실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그의 정신세계도 충실해서 이승은 물론 저승까지 충실해지고 충만해진다고 믿고 있다. 보이지 않는, 믿기 힘든 사후의 천당 지옥에만 신경 쓰는 사람은 현실 도피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이거나 몽상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변을 "신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고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실존주의 철학자인 칼야스퍼스의 말로 곧잘 대변하지만, 자녀를 두지 못한 사람이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로 자위하는 것 같은 공허함을 느낀다. 신이나 절대자가 있어 내세에 천당과 지옥행을 판별한다면 먼지투성이의 어리석고 못난 나 같은 사람의 지옥행은 따 놓은 당상 같아 그것이 괴롭고 두려웠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신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의 허세 같은 것임을 알고 있다.
끝내 알 수 없는 절대의 신비에 과감하게 자신을 의탁하며 신앙을 가지는 것에 대해, 아직까지는 `신은 없다`고 생각하며 유예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불안과 불행, 고난과 외로움을 만날 때마다 조상님의 원려와 가호와 보살핌이 있어 그 정성이 희망과 용기를 만들어 주는 원천이란 사실을 깨닫곤 한다. 그래서 고난과 불행과 어려운 처지를 당하면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 맞는 심정으로 추원한다.
이렇듯 나는 조상에게 감사하며 믿고 의지하고 숭배하니, 종교라기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지만, 숭배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이므로 `조상교`라고 명명했다. 난해한 교리도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종교적인 진리도 신도를 모으기 위한 전도도 필요 없다.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조상의 바람에 어긋나지 않도록 부단한 자기 성찰의 노력만 있을 뿐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 덕분인 것이 엄연한 사실이요 진실이다. 부모님께서 후대를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으며 인고와 희생을 감내하면서 양육하고 가르쳐 왔다. 나를 그렇게 길러주신 부모님, 부모님을 그렇게 길러 주신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면연히 지극한 정성과 헌신적인 보살핌이 이어져 왔다.
선대 조상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조상님의 바람과 염원에 소홀함이 없도록 자신을 여미고 아끼고 노력하면 생시와 같이 조상님의 가호와 보살핌이 미친다는 것이 조상교의 내용이며 행동 강령이다. 그것은 곧 올바르게 사람 노릇하려는 당연한 마음가짐이요 몸가짐이다.
부모를 섬기지 않고, 형제 이웃 간에 불화하고, 신의를 저버리고, 기만과 거짓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특정 종교를 믿는다고 천당 가고 극락 간다면 이것은 모순이고 혼돈이고 사기다. 올바르게 사람 노릇하는 것이 현실에서도 천당에 사는 방법이며 내세에 극락 가는 길인 것이다.
"네가 올바르고 건강하게 살아가지 못하면 우리 내외가 먼저 조상님께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조상을 욕되게 하는 자손이 되어선 안 된다." 하시던 부모님의 간절한 당부 말씀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보다 더 나를 두렵게 만들었으며 그 어떤 종교의 가르침보다도 절실한 삶의 지표로 각인되어 있다.
조상과의 관계는 하늘이 맺어준 천연으로써 숙명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 사랑의 관계다.
조상교의 신자로서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소홀함이 없는 연후에 고등종교를 선택하여 믿음을 가진다면 참으로 믿음이 깊어지고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의 명리와 권력과 재물과 유희로 열려있는 마음을 가정으로 돌려 조상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생시의 기대와 바람에 어긋남이 없도록 노력하는 조상교는 모든 고등종교의 기반이요 토대라 생각한다.
사람은 저마다 마음속에 절대자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는 지금의 시대에는 무엇 한 가지를 가리켜 최고가치라고 말하기가 힘들게 되었지만, 우선은 저마다 조상교의 신자가 되는 것이 올바르게 사람노릇 하려는 당연한 마음가짐이요 몸가짐이라 확신한다.
교회나 산사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거나 합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숙연하고 경건한 느낌을 받는다. 이와 함께 임종의 순간이 될 지 영영 이승에서는 기회를 갖지 못할 지 알 수 없지만, 유예해 두었던, 공식적으로 기재할 수 있는 종교를 갖고 싶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2004. 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