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요계 1세대의 대표적인 한 민족가수 백년설의 가요를 듣다가 생각해 보니 2010년 12월 6일은 가수 백년설이 서거한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금도 국내외의 우리 민족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불려지고 있는 그의 가요는 많다.
가수 백년설의 가요를 성주에서 들으면서 지역사회 주민들의 그에 대한 추모의 정이 남다름을 자주 느낀다. 민족가수 백년설 서거 30주년을 맞아 그 동안에 가요사 관련 문헌과 자료에 소개된 그의 가요 인생을 재정리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백년설의 본명은 이갑룡(李甲龍)이었다. 1915년 5월 19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414번지에서 아버지 이영순과 어머니 김차악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성주공립보통학교(현 성주초등학교)와 1931년 성주농업보습학교(현 성주중?고등학교 제4회)를 졸업하였다.
성주농업보습학교(현 성주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이갑룡은 애당초 가수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 이름을 이창민(李昌民)으로 바꾸고 시와 희곡을 쓰며 문학에의 포부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23세 때에 테너 안기영으로부터 시에 소질이 있음을 인정받아,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작사 활동을 하게 된다. 그 무렵부터 작사가 박영호, 가수 채규엽·박향림 등과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창민은 1938년 12월, 극작 공부를 하기위해 일본에 가던 중, 태평레코드사의 문예부장 박영호 일행과 합류되어 일본에서 가요「유랑극단」을 취입하게 되었다. 이 가요는 1939년 1월에 출반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그를 태평레코드사 전속 가수가 되게 하였다.
그는, 언제나 백의민족의 기상을 지니고 싶다는 꿈과 포부를 담아 스스로 예명을 `백년설`이라 붙였다. 1940년에는 뒷날 그의 대표곡이 되는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등을 발표하면서 남인수와 함께 당대의 대표적인 가수로 등장하게 된다. 이때 나온「번지 없는 주막」·「산 팔자 물 팔자」 음반에서부터 우리나라에서 `대중가요`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백년설은 1941년 12월 파격적인 대우로 오케레코드사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고향설」(1942), 「아주까리 수첩」(1942) 외에는 큰 인기곡을 낳지 못하였다. 그의 대표곡 대부분 「고향 길 부모 길」 「두견화 사랑」 「일자일루」 「석유등 길손」 「어머님 사랑」「산 팔자 물 팔자」 「한 잔에 한 잔 사랑」 「만포선 길손」 「비 오는 해관」 등은 태평레코드사에서 탄생된 것 들이다. 이런 가요들로써 당시 백년설은 가요황제 남인수와 쌍벽을 이루며 국권을 잃은 겨레의 심정을 잘 어루만져 주는 민족의 가객으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백년설은 8?15 해방이 되던 해 9월, 대구에서 을 조직하여 연극 「깃발을 흔들던 날」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해방 후 최초로 공연된 연극이다. 이듬해에는 김해송이 이끄는 유명한 KPK 악극단에 특별출연하기도 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6·25 동란 후에는 목재사업, 고아원 운영, 경향신문 동경지사를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사업 활동은 그의 본령이 되지는 못하였다. 1953년에는 서라벌레코드사 설립, 1958년 백민영화사 창설, 같은 해에 한국가수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1963년에는 한국연예단장협회장을 지내면서 연예활동을 재개하기도 하였다.
1978년 9월 백년설은 자제들의 초청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1980년 12월 6일 그곳에서 향년 65세로 `나그네 설움`의 인생을 마감하였다.
보다시피 백년설은 한국 가요 토착기에 가요와 연극, 가극, 악극, 영화 활동으로써 우리 민족의 애환을 대변해주었던 대표적 가수이다. 성주 성밖숲에 있는 기존의 그의 노래비에 더하여 최근 그의 모교 교정에 흉상과 노래비를 세웠음은 한국 가요사를 정리하는 면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한국 가요정신을 전승, 발전시키는 면에서, 지역사회의 문화콘텐츠를 발굴하여 지역 브랜드로 삼는다는 면에서 속개도 의의 있는 행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사회에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가 어떤 사유에서든 중단되고 있음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족 가수 백년설의 고향, 성주에 그 가요사적 유·무형 업적물과 기념물, 유품도 잘 보전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을 성주에 체계적으로 정리, 홍보, 전수할 타당성이 있다. 한국 가요계 1세대의 대표적인, 한 가수의 예술혼과 정신은 한국 가요사에 영원히 기록되어야 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