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7∼8세 무렵으로 생각된다.
닷새에 한 번씩 온갖 농축산물을 이고 지고 또 가축을 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행렬을 보았다. 호기심에 어디를 저렇게 몰려 가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더니, 오늘이 고령장날 이라고 하신다.
도대체 고령장이 뭣하는 곳이기에 어른들이 저렇게 앞다투어 간단 말인가? 어린 생각에 궁금증이 발동하여 언젠가 나도 한번 가 봐야겠다고 벼르던 참에, 마침 어느 날 아버지께서 토종닭 두어 마리를 망태기에 담아 걸머지시고는 고령장에 가신다고 하셨다.
다짜고짜 나도 가겠다고 아버지에게 떼를 썼다. "먼 길이라 너는 어려서 못 간다. 좀 더 크면 구경 한 번 시켜줄께"라며 아버지께서 말리셨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보채는 쉰둥이 막내아들의 생떼에 못 이기셨던지 마지못해 허락을 하셨다. 내가 다섯형제의 늦둥이 막내라 평소에 아버지에게 응석과 떼 쓰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형들과는 다르게 대부분 들어 주셨고, 예뻐하셔서 아버지가 최고의 든든한 빽이다. 성장하면서 그것이 내리사랑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한 푼이라도 아끼시려고 8㎞나 되는 거리를 걸어가실 요량이셨지만 느닷없는 떼쟁이 동행자 탓에 할 수 없이 버스를 타기로 했던 것이다. 평소에는 늘 걸어 다니시던 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룰루랄라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아버지의 뒤를 쫒아 동구 앞 신작로까지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차가 도착 했지만 이미 발디딜 틈 없는 만원버스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 겨우 2∼3번 다니는 시골버스인데다 오늘이 바로 장날이 아닌가. 아버지께서 인파를 비집고 버스에 올라서자 나도 놓칠세라 아버지의 허리띠에 매달리다 보니 나의 발은 거의 공중 부양상태로 떠밀림에 몸을 맡길 수 밖에.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비포장 자갈밭 길이라 덜커덩거리며 요동칠 때는 사방에서 비명과 함께 아우성 소리로 아비규환이었고, 그때마다 나는 `켁` 소리와 함께 숨이 멎는 듯 했다. 그야말로 생지옥을 연상케 하여 괜히 왔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숨 막히는 시간이 한동안 지속되어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 고향 마을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오로지 산과 들녘, 그리고 시냇물만 보고 자랐는데, 산골마을 아이 눈에 미친 오늘의 장터 모습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볼거리 천지였다. 그냥 별천지라는 느낌이 너무 강해 혼란스러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드는지 마치 구름처럼 떠밀려 다닌다는 말을 실감했다.
장터에는 온갖 것 다 진열해 놓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손님을 청하는가 하면, 소, 닭, 돼지 등 그렇게 많은 가축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특히 음식점이 즐비한 식당 골목 국밥 집 앞을 지날 땐 가마솥에서 연신 김이 뿜어져 나오고 고깃국 냄새가 나의 코를 자극하여 정말 먹고 싶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도 아버지 허리춤에서 손이라도 놓치는 날엔 인파 속에서 영락없는 미아가 될 것만 같아 끌려가다시피 매달려 종종걸음을 치다보니 숨이 턱에 찼다.
돌이켜보니 그 날의 장날 나들이가 외부 세계와의 첫 경험이어서 오래도록 머릿속에 각인되어 그날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행정구역상으로 나의 고향은 경북 성주군이다. 그러나 이웃군인 고령이 마음만 먹으면 이처럼 언제라도 쉽게 갈 수 있고 또 고령장 이용으로 모든 생활권이 고령과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래서 내 고향 성주 보다는 고령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훗날 늦깎이로(초등학교 졸업 3년만에 중학교 입학) 유학(?)하여 고령중학생이 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고, 내친김에 고등학교까지 어렵사리 그 곳 고령에서 마치게 됐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 6년을 고령에서 보내는 동안 수많은 추억거리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학창시절 고령읍내 연조리 정학수씨 댁에 하숙할 때 인자하던 주인아주머니가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그 댁 옆집에 아들만 넷인 양씨 성을 가진 분이 살고 있었는데, 위로 두 아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아래로 두 명은 나보다 어렸다. 그런데 이름이 첫째부터 만수, 천수, 백수, 일수로 기억하고 있다. 어린 마음에 막내가 또 태어나면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하고 괜한 걱정을 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합천 치도 월기저수지 옆에서도 하숙을 했는데, 그 댁 어른께서 나의 아버지와 막역한 사이라는 이유 때문에 하숙을 그 댁에서 하게 되었다. 지금도 `되쟁이`라는 직업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댁 어른께서 고령장터에서 되쟁이를 했던 것이다. 농사꾼들이 수확한 곡식을 마대나 가마니에 담아 시장으로 싣고 오면 멍석에 쏟아 놓고 소비자에게 됫박이나 말(斗)로 팔아주고 마지막에 남는 곡식을 수입으로 하는 직업이 `되쟁이`다. 말하자면 곡식을 팔아 준 수고의 댓가이다.
모산골에서는 나의 질녀 인숙이와 자취를 했는데, 동기동창인 친구 영식이와 그리고 다른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뒷산인 주산 중턱을 오르내리며 호연지기를 키웠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 시절 산에서 발끝에 채이는 것이 사금파리였는데, 그것이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1,500여년 전 찬란했던 대가야국의 문화유물 조각이었음을 알고는 모골이 송연하여 야릇한 전율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사춘기 6년 동안 고령에 기거하면서 주산을 비롯하여 골목골목 천방지축 뛰어 놀던 추억이 강하게 각인되어 문득 문득 활동사진처럼 뇌리를 스치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학교에 악대부가 구성되어 내가 초대 악장을 맡았다. 개교 기념일 혹은 특별한 날엔 악대부가 앞장서 연주하고 그 뒤를 전교생들이 질서 정연하게 따르며 시가행진을 했다. 읍내 중심가 시장통을 거쳐 합천 치도를 한 바퀴 돌 땐 악장인 내가 맨 앞에서 행진곡에 발맞춰 지휘봉을 휘둘러 시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 우쭐했던 기억이 있다.
2005년 4월 고령군 `대가야 체험축제`에 나도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날 `고령군민의 날` 선포와 대가야박물관 개관도 있었고, 주산 능선에 고고하게 자리한 지산동고분군(사적 제79호)을 답사하기도 했다. 박물관에는 1,500여년 전의 문화유적, 유물을 출토하여 전시해 두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순장무덤도 복원, 전시했다. 그리고 명문대가의 출중한 인물들을 배출했던 곳곳에 독립투사, 애국지사 신도비, 공적비, 효행비를 세워 선현들의 뜻을 기리고 있는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 날 행사를 계기로 대가야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고령문화원에서 발간한 각종 문헌을 통해 많은 것을 터득하게 됐다. 고령이 후기 가야의 맹주국이었다는 것과, `고령` 하면 대가야국이 연상되고, `대가야국` 하면 가실왕이 생각나며, 또 악성 우륵 선생의 가야금이 연상되는 것이 이제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오늘 날 후손들이 선조들의 업을 기리는 뜻에서 대가야 국악당을 건립하여 매년 대가야 문화예술제와 가야금 경연대회 및 각종 행사가 열리고 있어서 전국적인 문화유적의 산실임을 알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 옛날 신비의 왕국 대가야국의 찬란했던 흔적이 곳곳에 베어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령과의 인연이 된 것이 내 생애에 우연한 행운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고령사랑에 더 애착심을 느끼는가보다. 더구나 한때 고령신문사에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여 이래저래 고령과는 숙명적인 관계라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철없던 시절 아버지를 졸라 첫 나들이를 하게 되었고, 별천지 같이 느껴지던 시골 장터의 풍부한 볼거리를 보게 되었다. 그 후 청소년기 6년을 그 곳에서 보내며 골목골목을 누빌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고령이 대가야국의 수도였고, 철기문화가 일찍 발달했음도 알았다. 또한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리 44호분의 내부를 전시관을 통해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부장품의 종류와 성격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산능선 일대에 크고 작은 2백여기의 고분군을 비롯해 대가야 양식의 토기와 철기, 말 갑옷, 금관과 금동관, 장신구 등 출토된 유물전시관을 통해 강성했던 대가야국을 알게 했다. 이 모두가 어린 시절 호기심 발동이 원인이 되어 고령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