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교수는 올곧은 학자로서 주위에 많은 분들로부터 존경과 명망을 받는 이 시대의 참된 선비다. 그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에서 배움을 찾고 우리의 전통과 습속을 지키는데 고집스럽고 외곬수다.
오랜만에 만나 안부 묻기가 바쁘게 “어느 불천위 종가의 종부가 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예수교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교회에 다니더니 우상숭배는 죄악이라며 조상 제사를 모시지 않아 한 문중이 망했다”며 비분강개 한다.
K교수의 분노와 탄식 어린 이야기를 듣고 있던 L형이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집안에서 겪었던 성공사례를 소개했다. “서울에 살고 있던 당숙이 돌아 가셔서 고향의 선산에 모시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맏상주가 기독교식 장례절차를 고집했다. 그래서 집안사람들이 장례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맞섰더니 상주가 고집을 꺾어 무사히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들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종교와 전통의 갈등이요, 맹신과 집착이 불러온 비극이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이 시대에 특정 종교를 비난하고 배척하는 태도와 우리의 전통과 정신적인 소중한 유산을 팽개치는 마음가짐이 안타깝기만 하다. 서로가 근본과 본질을 망각한 채 지엽적인 사실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에 공허한 아픔을 느꼈다.
종교도 전통도 인간이 만든 것이란 엄연한 사실을 직시해보면 이러한 갈등은 해소되고 융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도무문(大道無門)’이란 가르침을 새겨본다.
대도무문이란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당연하고 마땅한 도리에는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나 자비는 이러한 갈등과 괴리를 메우고 다독거려 융화시켜 올바르게 인도하여야 함에도 현실적으로는 우리의 전통과 소중한 정신적인 유산을 매도하고 파괴하고 팽개침으로써 가정과 사회에 불화와 갈등을 야기 시키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닌, 미망(迷妄)과 이기심에 집착한 어리석음이라 생각한다. 제사는 조상에 대한 보은과 감사의 표시이다. 인성의 근본인 감사하는 마음을 져버리는 것은 신앙인은 물론 인간됨을 거부하는 태도이며, 불씨같이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팽개치는 것은 자신을 말살하는 어리석고 못난 행동이다.
교회에서는 모범적인 신앙인인지 모르지만 가정에서는 지혜롭고 현명한 주부가 되지 못한 어리석은 종부가 못내 안타깝고 측은하다.
L형이 말한 반란을 평정한 듯 자랑 섞인 이야기의 경우는 신앙인으로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수용한 자세가 돋보인다. 전통만을 고집하는 문중과 집안 어른들의 이해와 수용이 아쉽다. 선대의 조상들이 잠들어 계시는 선산에 유택을 마련하러 왔는데 장례절차와 의식을 문제 삼아 장례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서로가 앙금을 남기지 않고 해결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6.25 사변이 정전(停戰)이란 이름으로 종전되는 해, 우리 동네와 인척이 된다는 문씨 성을 가진 전도사가 퇴락한 집 한 채를 빌려 교회당을 차려 놓고 선교활동을 했다. 그 당시 교회에 가면 서양 사람들이 입던 헌 옷이나 분유가루, 과자 등 소위 구호물자를 나누어 주던 시절이었다. 전쟁 후라 물자가 부족하고 생활이 곤궁하여 신앙보다 구호물자를 받기 위해 교회에 가는 사람이 많았다. 종교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랫마을 일꾼들의 아낙과 아이들이 밤마다 불러대는 찬송가와 문 전도사의 광기 어린 외침에 온 동네가 조상의 향화(香火)마저 모시지 못하는 말세를 맞이한 양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나는 기독교의 교리를 알지 못했지만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고 착한 일을 하면 천당에 가고, 조상제사를 받들면 안 되는 정도로 기독교를 이해했다. 우리 몇몇들은 조상 제사를 받들지 않는 불경한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에 임시 교회를 습격하여 몽둥이로 해산을 시키고 우리 마을에서 영영 교회를 쫓아냈지만 신앙의 자유를 방해한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만만치 않은 양반동리의 어린 학생이라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예수교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성경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철없는 소년시절 교회에서 난동을 부린 멍든 추억은 지옥을 연상케 하는 두려움이 되었다. ‘신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고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칼 야스퍼스의 말을 나를 위한 변호라 생각하며 엉거주춤한 무신론자로 살아간다.
어느 집 며느리가 제사를 모시기 싫어 예수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다. 특정 종교의 교리와 인성을 모독하는 말이다. 갈등의 골을 메우고, 치유하고, 변주하는 데는 대도무문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있다.
K총장의 농담 어린 진솔하고 거침없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K총장은 세계적인 물리학자이며 유가(儒家)의 전통을 숭상하며 옛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앞장선 분이다. 그의 동생은 이름이 알려진 과학자이며 기독교계에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서로의 신앙 때문에 생기는 불화나 갈등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동생이 예수교를 믿으라고 전도하면, 우리 조상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천당에 못 가셨을 터이니, 나는 저승에서 조상을 뵙고 싶어 예수교를 믿을 수 없다”고 농담 어린 말로 받아 넘기면 형제는 같이 웃고 만다는 것이다. 서로의 신앙과 생각이 충돌하거나 반목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신앙을 통해서 현실의 행복과 정신적인 안정과 평온을 기원하고 내세에 천국에서 영혼의 행복을 몽상한다. 기원하고 꿈꾼다는 것은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행복은 자신의 마음가짐에 있으며, 내세의 천당과 지옥은 신이 판정하기에 자각하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이라 생각한다. 신앙은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허물을 벗겨가는 자각행위인 것이다.
예수주의가 되고 석가주의가 되고 공자주의가 되어버리면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문드러진 만신창의 모습이다. 임제 선사가 ‘부처를 죽여라’ 한 것은 부처를 뛰어넘으란 말이다. 부처 때문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본말(本末)을 전도하는 미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근본을 알고 지엽적인 것을 초탈하는 지혜와 관용과 사랑이 있어야 대도무문의 뜻을 바로 새기고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함께 미망과 아집을 뛰어넘어 거리낌 없이 갈 수 있는 넓은 길을 바라보자고 외치고 싶다.
마음이 옹졸하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지만, 마음이 넓어지면 온 우주가 들어가도 오히려 남음이 있다고 했다.
일회성의 여행증명을 가지고 도착한 현실의 삶을 조화롭게 살다가 여유롭게 죽고 싶다. ‘만물이 어울려 자라되 서로 해치지 아니하고 도가 어울려 행해지되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중용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200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