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지개가 시작되는 아침 출근길. 분주히 움직이는 인파를 바라보면서 엉뚱하고 잔망스럽게 죽음을 생각한다. 고고(呱呱)의 울음과 함께 죽음을 담보로 시작한 삶이 숙명을 망각한 채 바동거린다. 이렇듯 부릅뜨고 줄타기하듯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숙연한 연민의 아픔이 베여온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속단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이 결국 삶이란 죽음을 포괄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에 빠져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거늘 사람들은 망령되게 있다고 한다(生死本無,妄計爲有)"는 보국조사 지눌의 법어를 되씹어본다.
어제 일요일, 신장병으로 5년 동안 투석하며 투병하고 계시는 장모님의 유택을 마련하기 위하여 지관을 대동하고 처가 선산을 둘러보러 가는 길에 우리 내외 묫자리도 봐두어야겠다는 욕심에 아들 셋을 데리고 갔다.
출가한 딸 하나뿐인 장모님 처지에 유택을 마련한다는 것은, 훗날 잡초만 무성한, 돌보는 사람 없는 무덤이 되어 오히려 불경스러운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이왕 화장하여 산골하자고 제의했더니 아내가 몹시 서운해했다. 그런 아내의 심정을 헤아려 유택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지관을 대동한 것은 명당자리를 잡아 발복을 바라는 허황하고 가당찮은 욕심이 아니다. 나보다 산을 알고 땅을 아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세 아들과 함께 한 것은 미래의 상주인 그들이 주관해야 할 일일뿐 아니라 죽음을 올바르게 안다는 것은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꾸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태연하고 당당하게 아내에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건넸지만 죽음과 삶의 덧없음을 생각하며 감정에 흔들림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가 선산에서 지관의 조언을 참작하여 장모님 유택의 위치를 결정하고 오후에 고향의 선산에 들러 아이들과 함께 평소 생각해 두었던 두 곳을 답사하면서 지관의 의견을 들었다.
늦은 오후,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산을 내려왔다. 떠날 때 행여 마음에 흔들림이 있을까 조바심을 가졌으나 내 마음은 바람 한 점 없는 호수같이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평생토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안도와 편안함에 취한 기분이었다. 무슨 조화일까? 생각을 더듬다 문득 40여 년 전 10살짜리 어린 나에게 비춰진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집 대문간 방에는 까맣게 옻칠한 윤기 나는 할아버지의 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에겐 그 관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작은 사랑채에 들르시던 일이 있으시면(지금 생각해보니 당신의 관을 어루만지고 싶어 작은 사랑채에 자주 들르셨던 것 같다) 대문간 방의 문을 열고 관을 어루만지시다가 넋 잃은 듯 탈속한 듯 내려다보시곤 하셨다.
허허로운 모습에 섬뜩한 두려움과 함께 갈 길이 멀지 않은 할아버지의 망령든 행동으로 생각했다.
이제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둔하고 어리석은 나의 글재주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그때 할아버지의 심경이 지금 나의 심경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비록 어리고 철없던 시절의 생각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영전에 그때의 불경을 사죄드린다.
내가 죽음과 처음 마주친 것은, 돌도 지나지 않은 젖먹이 어린 것을 두고 친정에서 장질부사(그때는 열병이라 했다)로 떠나간 누님의 죽음이었다. 그때 일곱 살의 철부지 어린 나는 누님의 시신이 건넛방에 누워있는데 유성기를 틀어놓고 노래를(무슨 노래인지 기억에 없다) 듣다가 아버지께 호되게 매를 맞았다. 그날 이후 죽음 앞에선 꼭 눈물을 흘리며 울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야릇한 거부반응을 안고 살아왔다.
너무 우스워서 허리를 움켜쥐고 한참 웃다보면 뱃가죽이 당겨오는 아픔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 있는 것을 느낀다. 기쁨이 곧 슬픔이요 슬픔이 곧 기쁨이다. 이렇게 기쁨과 슬픔이 한계를 잃고 한마당으로 융합되는 것이 삶의 이치인데, 누님의 죽음 앞에 바친 유성기의 노래는 멋진 내 나름의 장송곡이었다는 아쉬움이 떠나지 않는다. 나는 예수교와는 먼 거리에 있지만, 찬송가를 부르며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장례 광경을 보면서 나도 죽으면 저렇게 가고 싶다는 충동에 가슴 설레었는지 모른다.
우리 재래의 전통상례에는 우는 데도 법도가 있다. 조객을 맞이하면서 상주가 예(禮)로써 하는 울음을 예곡(禮哭)이라 하고, 때때로 슬픔에 북받쳐 우는 애곡(哀哭), 식음을 전폐하고 가슴이 터지도록 아프게 우는 것을 통곡(痛哭)이라 한다.
죽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일진데, 소란한 울음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마음 속으로 이별을 아쉬워하다가 때때로 슬픔에 북받쳐 우는 애곡이 합당한 슬픔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짓궂게도 아내의 죽음 앞에 독을 두드리며 춤을 춘 장자(莊子)의 고사가 생각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처음으로 시신을 대했다. 죽음은 추하고 무섭고 어둠의 장막에 가려진 단절로 알았으나, 깊은 잠에 드신 듯 평안한 모습으로 누워계시는 어머니 시신을 뵈오면서 안도와 평화와 축복을 느꼈다. 나와 나의 아이들은 장례날까지 어머니의 시신을 평소와 같이 함께 자리를 했으며, 죽음의 참모습을 가르쳐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살아있는 사람의 마지막 욕심은 죽음 복(福)이다. 자기 집 아랫목에서 천수를 다하고 죽는 것을 고종명이라 한다. 옛날엔 고종명을 인간이 누리는 다섯 가지 복 중에 하나로 꼽았지만 지금도 죽을 때 고통 없이 오래 고생하지 않고 자식들에게 부담주지 않고 깨끗한 모습으로 죽는 것을 소망한다. 그러나 이익과 편리만을 추구하고 이기심에 사로잡혀 생각이 뒤집히고 눈과 귀가 멀어 미치광이가 되어 살아가는 현실의 삶 속에서 참담하고, 원통하고, 부끄러운 죽음이 판을 치고 있어 죽음은 참혹하고 추한 모습으로 각인되고 있다. 살아생전의 모습대로 죽는다는 가르침이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방귀의 구린내가 방안의 매화분에 오염될까 염려하여 매화분을 창밖으로 옮기게 했다는 퇴계 선생의 임종의 모습은 사람과 죽음을 꿰어놓은 한편의 경전을 대하는 듯하다.
우리네 성현들은 때로는 자신의 죽음까지 예견하고 그 죽음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책임진다는 뜻이다. 삶의 끝자락에 이어져있는 죽음은 삶의 일부이자 삶의 완성이다.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은 어떻게 사느냐와 같은 뜻이 아닐까? 그러기에 삶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죽음까지 사랑해야 한다.
장자(莊子) 외편(外篇)의 한 구절을 적어본다.
"삶도 죽음의 동반자요, 죽음은 삶의 시작이니 어느 것이 근본임을 누가 알랴. 삶이란 기운의 모임이니 기운이 모이면 태어나고 기운이 모이면 죽는다. 이와 같이 삶과 죽음이 같은 짝이 됨을 안다면 무엇을 근심하랴. (生也死之徒 死也生之始 孰知其紀人之生 氣之聚則爲死 若死生爲徒 吾又何患)"(1994.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