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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친구 K가 방문했다. 인사는 팽개치고 겨자 씹은 표정을 지으면서 `세상은 말세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하긴 예측불가능의 말세를 살아가는 것이 인간인데 새삼 놀랄 일도 아니란 생각에 덤덤하게 사유를 물어보았다.
내용인즉 오래간만에 우의를 다지자는 고등학교 동기인 친구의 초청으로 여섯 명이 모여서 그 친구의 집에서 go-stop판이 벌어졌단다. 자정쯤 그 집 주인이 볼일이 있다고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갖가지 중국요리가 가득한 상을 차려 와서 과분히 접대하는 것에 모두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사실은 오늘 우리 아버지 제사인데 많은 음식을 처분하기 위해서 친구들을 초대했다."면서 자기 집에서는 번거롭게 제수를 장만하지 않고 음식점에 부탁해서 한식, 양식, 중식을 매년 번갈아 마련해서 부모님이 여러 나라 음식을 드시도록 배려한다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더란 것이다. 순간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한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까맣게 잊어버린 채 묻혀있던 유년기에 한 삽화가 소꿉장난하다가 사금파리에 손가락이 찔려 흐르던 붉은 핏방울 같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나보다 한두 살 위인 용수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야무지고 당찬 아이가 거인(巨人)의 모습으로 다가섰다. 용수는 성(姓)은 알 수 없지만(성을 들은 일이 없다) 망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우리 집 일꾼의 아들이다. 나와는 별로 어울리는 일이 없었으나 그 날은 우연하게 그의 집에 갔다. 울퉁불퉁한 흙벽의 좁은 방 시렁 위에 땟국이 흐르는 이불 한 채가 덩그렇게 얹혀 있었고, 반대편 모퉁이에 짐승의 형상 같기도 하고 사람의 모습 같기도 한 어른의 손바닥만한 검은 돌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신기하게 생각되어 무슨 돌이냐고 물었더니 "너그 집에는 신주(神主)모시고 제사지내지만 우리 집에는 저 돌을 모시고 제사지낸다. 큰 것은 우리 할배 돌이고, 작은 것은 우리 할매 돌이다."면서 자랑스럽게 뽐내는 태도로 설명했다. 돌 놓고 제사 지내는 처지에 거들먹거리는 용수의 태도가 얄밉고 측은하게 느껴졌다.
교의(交椅)에 신주를 모시고 크고 높은 제상 위에 여섯 가지 이상의 과일이 놓여지고, 휘황하게 촛불을 켜놓고, 갓 쓰고 도포 입은 어른들이 즐비하게 서서 축을 읽고 잔을 올리고 절을 해야 진짜 제사모시는 것이지 돌 놓고 지내는 제사는 엉터리 가짜배기란 나의 설명에 용수는 자기 집 제사가 진짜라며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기세로 항변했다. 결국 용수와 나와의 어렵사리 이루어진 만남은 어린 용수의 마음에 앙금을 남겼으며 나에겐 가당치도 않은 웃음거리로 망각의 심연에 잠겨 버렸다.
40여 년의 세월을 망각의 심연 속에 묻혀있던 어린 시절의 삽화가 문득 깨달음의 전기가 되어 내 가슴 속에 감동의 격랑으로 다가왔다.
나는 직장 따라 타관에서 생활하느라 고향의 종택과 재산관리와 제사를 비롯한 모든 일은 생가의 부모님께서 대신해 오시다가 아버지 연세가 일흔 되던 해에 종택과 농토는 먼 친척에게 맡기고 합거했다.
여섯 칸짜리 작은 한옥에서 삼대가 함께 생활하면서 부모님의 자애로운 보살핌과 어린 아이들의 재롱이 어우러져 가족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으나 좁은 마루에 호마이카상을 펴놓고 지방을 부쳐놓고 제사를 지낼 때마다 조상님께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고문당하는 심정이었다. 특히 고향 종택의 사당에 계시는 신주를 벽감이라도 마련하여 모시지 못하여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죄인이 된 두려움과 갈등과 자괴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치고 있는 처지라, 놀음판 벌여놓고 음식점의 요리로 제사를 모실만큼 타락하지는 않았다는 자위와 함께 유년기의 용수의 삽화가 탈출의 계시가 되었다.
나는 상사람 제사지내는 것을 목격한 일이 없다. 유씨집 하인이 주인집 축문을 외워 자기 아버지 제사에 축을 외우면서 축머리에 `유세차`란 성씨를 표시한 것으로 짐작하고 자기 성을 따라 `김세차∼∼`라 했다든지, 쌀이 없어 꽁보리밥으로 제사를 모시는데 삽시(揷匙)하니 찰기가 없어 숟가락이 넘어지니 "논 한 마지기 물려준 것 없으면서 보리밥이라고 싫다고 한다."는 등의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통해서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떠놓고 갓도 쓰지 않고 도포도 입지 않고 꾸벅 절하는 제삿날만 메우는 식을 두고 쌍놈제사로 생각했다.
형식과 절차와 제수만으로 이야기하면 나 자신부터 쌍놈식으로 제사를 받들어온 지 오래다. 제사를 입제(入祭)날 새벽 1시경에 모시던 것을 파제(罷祭)날 저녁 9시에 모신다. 제수의 풍성함이 옛날만 못하다. 그럼 내가 겪은 양반집 제사는 어떠했는가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을 억누르며 돌이켜 본다.
제수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할아버지의 편치 않으신 심기는 불호령이 되어 아버지, 어머니를 조상님께 불경한 죄인으로 만들었으며, 온 식구가 두려움에 떨었다. 과다한 제수 마련으로 부채가 누적되어 한 해가 다하면 농토를 처분해서 부채를 갚아야하는 순환의 질곡 속에서 어린 나는 `이것은 아니다`는 내심의 절규와 함께 분칠한 허세와 위선을 느꼈다.
예(禮)에는 정신과 표준과 형식, 그리고 시류(時流)의 3가지 요소가 있다. 정신은 변할 수 없으며 변해서도 안 되지만, 표준과 형식은 시류에 따라 합당하게 변해야 한다.
제사는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정을 잊지 못하는 보은과 감사의 표시로서 돌아가신 날 조상의 영혼에 음식을 바쳐 정성을 표하는 예절이다. 따라서 감사하고 공경하는 마음과 정성이 따르지 않는 제사는 다른 사람의 이목을 의식한 겉치레 행사일 뿐이다.
양반제사와 쌍놈제사란 신분의 귀천과 제수에 의한 구별이 아니라 감사하고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 정신에 있다. 감사하고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며 할배 돌, 할매 돌을 소중히 모시는 용수 집 제사가 진정한 양반제사이며 우리가 본 받아야할 마음가짐이라 생각한다.
6·25 사변 일 년 후, 용수네는 우리 마을을 떠났다. 비루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우리 할배 돌, 할매 돌이라고 외치던 용수의 모습이 떠오르며 간절하게 그립다. 지금도 할배 돌, 할매 돌을 소중하게 모시고 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하면서 용수네 가정에 항상 행복이 넘치길 기원한다.(198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