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차에 부치는 새해의 소망
계미년 마지막날 12월 31일 업무를 마치고 한해를 마감하는 간담회를 겸한
식사 자리를 가졌다. 모두들 한해를 돌아보며 부산하게 식사를 마치고 이제
내일이면 다가올 갑신년 새해의 덕담을 나누며 헤어질 무렵이었다. 수필가
조명래님이 이곳에서 자신의 집이 가까우니 가서 차나 한 잔 나누고 가자고
공고를 했다.
10여명이 따라 나서 조 수필가 댁으로 갔다. 차와 송엽주를 내 왔다. 송엽
주 또한 향이 일품이었으나 술은 연말이고 대부분 차가 있어서 한 모금씩도
체 마시지 않았다. 뒤이어 녹차를 끓여 내는데 백련차라고 했다. 조금 있다
가 부인께서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봉지 하나를 꺼내왔다. 전북 김제까지 가
서 백련차와 함께 차로 우려 마시기 위해 사온 흰 연꽃이라고 했다.
봉지를 벗기자 윗 부분은 은박으로 정성스럽게 쌌는데 연꽃 대궁은 그냥
내밀고 있었다. 은박을 벗겨내자 꽃은 다시 연잎으로 싸여 있다. 연잎을 벗
겨내는데 얼어서 제대로 벗겨지지 않고 튿어 진다. 연잎을 다 벗기자 이번에
는 비닐 봉지로 꼭꼭 싸매어 두었는데 이것을 풀자 하얗게 언 백련 한 송이
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대로 백련차를 마시려면 수반 크기의 다완에 백련을 꽂아놓고 뜨거운 물
을 부으면 꽃잎이 활짝 피고 그리고 나서 계속 찻물을 끼얹으면서 우려서
마신다고 하지만 오늘은 약식으로 연꽃잎을 따서 차주전자에 넣고 끓는 물
을 부어 한참 우려낸 다음 사발에 부어 다시 둘러앉은 사람들의 찾잔에 따
라 주었다. 백련차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한 향기가 풍기고 차를 마신 다음
입맛을 다시며 차 맛을 음미하자 목구멍에서 비할 수 없는 향긋한 연꽃 향
기가 입안으로 번져온다.
어린 시절 8월쯤이면 사과 서리 가서 산비탈 사과 밭에서 고향 마을의 뒷
미 연못께를 스치고 온 바람에 실려온 추억의 연꽃 내음을 맡던 그대로의
향기다. 참을 수 없는 상쾌한 향기를 이란 제목으로 한 수의
시로 읊어 보았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다담상을 둘러앉아
다가올 새해를 이야기하며
차를 마신다.
주인은 냉장고의 문을 열고
연대궁이 비져 나온 봉지 하나 낸다.
은박을 걷어내고
굳어서 튿어지는 연잎을 벗기고
비닐 봉지의 맺힌 매듭을 풀자
얼어서 창백한 얼굴
묵은해를 보내는 흰 연꽃 한 송이.
차주전자 두껑을 열고
한 잎, 두 잎
또 한 잎, 또 한 잎 ........
주인의 손끝에서 꽃잎이 낙화처럼
주전자 속으로 내려앉는다.
뜨겁던 지난 한해의 삶으로 끓인
물을 붓는다, 그리고 한참.
얼어서 등이 굽도록 힘겨웠던
한해의 시간들이 투명하게
찻잔으로 쏟아진다.
목구멍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차 한잔
되도록 천천히 삼키고 입맛을 다시자
목젖을 거슬러 활짝 피어나는 꽃잎 하나
백련차 향기는 그렇게 온다.
갑신년 새해도
백련차 연꽃 향기처럼
활짝 피어나는 꽃잎이기를 소망한다.
시는 계미년을 전송하는 마지막 밤에 곧바로 쓰기 시작하여 거의 완성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깨니 새벽 4시가 채 되지 않았다. 글을 완
성시켜 성주신문에 올릴까 하고 컴퓨터를 열었으나 글이 되지 않았다. 시만
손을 보다가 새해이니 몇 해째 신정(新正)에 해오던 대로 수도산 서봉사에
올라가서 해맞이를 했다.
자식에게 좀더 따뜻해져 바른 길 가게 거들어 주고 아내에게 좀더 너그러
워지고 부모님께 좀더 정성스러워 지자. 그리고 나 자신은 꼭 해야할 일은
서둘러 하고 시를 많이 쓰도록 하자는 등의 극히 사적이고 상투적인 소원을
빌고 내려와 신천에 가서 한 시간쯤 운동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나도 구정을 쇠지만 그러나 나로서는 신정이 비교적 경건한 한해 맞이의
느낌이 든다. 물론 설을 맞는 명절의 기분은 음력 설이지만 사실 구정은 시
골에 가야하고 명절 차례를 지내야 하고 마치 잔치를 치르는 분위기인데 양
력 설은 마음만 먹으면 조용하고 경건해 질 수 있어 자신을 되돌아 보는 해
맞이로는 안성맞춤이다.
무한한 자연은 거침없이 유유히 흘러간다. 그래서 자연의 것에는 맺힌 매듭
이나 실밥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인간은 흘러가는 시간의 어귀마다 마디
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며 새해라는 이름의 매듭에 나처럼 지극히 기복적
(祈福的)인 바람과 다짐을 매어두는 사람이 많으리라.
다시 생각하면 인간은 그 자체가 우주다. 자아가 없다면 우주도 이 세상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작은 우주가 자신의 운행에 새로운 계
기를 마련하고자 해가 바뀌는 길목에서 송구영신의 다짐을 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다짐들을 통하여 찌들고 냄새나는 삶을 지양하고 보다 인간다
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갑신년 새해에는 인간이
란 작은 우주마다 향기 그윽한 백련 한 송이씩 간직하고 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