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시대는 바뀌어도 역사의 진실은 보존 전승돼야 하고, 그 일은 같은 역사의 한 마당을 밟고 살았던 동향인이나 동창학우가 그들의 후생들에게, 영영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사실(史實) 그대로 전해 야함이 마땅하다. 여기 25년 전 한국 정치사에 일어났던 한 `풍운아적 사건`을 더 이상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안 되게 그 과거사를 오늘의 `시론`(時論)으로 현실화해 본다. 그 역사의 주인공은 한 때 의정단상에서 시국적 발언으로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던 젊은 정치인 유성환 의원이요, 그 사실을 진실 그대로 해석하고 증언한 주역은 같은 성주중학교 동창인 나채운 교수(당시)이다. 나 교수는 당시(전두환 정권 때) 유 의원이 국회에서 발언한 내용이 친공(親共)으로 문제시돼 마침내 구속이 되고 의원직도 일시정지 당했는데(후에 무죄 석방), 유 의원 면회도 허용되지 않아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한편으로 그의 발언 소위 `국시`(國是) 문제에 대해 법적·국어학적으로 예리하게 해석해 `유성환 의원 무죄`를 신문에 보도하고, 그 사안을 담당한 박영무, 정지형 판사에게도 전달한 바 있다.【편집자 주】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 치고 오늘의 우리의 정치현실을 보고 깊은 우려를 갖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가(비록 일면적이고, 수백 억의 외채를 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을 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정치적인 안정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안정이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방면의 발전의 토대가 될 뿐 아니라 나아가 국가 존립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괴가 서울에서 60킬로미터도 못 되는 거리에 진을 치고 있는 우리의 현실임에랴. 그러면 정치적인 안정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실천 그것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나라 국민이 촌시도 잊어서 안 될 것은 `반공`이다.
지난 10월 13일 신민당의 유성환 의원이 `국시`(國是)에 관한 발언을 해서 드디어 의원 구속의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 아직도 무엇이 사실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를 모르는 가운데 얼떨떨해 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소위 `국시`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고, 유 의원의 발언내용에 대한 해석이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나 자신의, 국시에 대한 정의와 유 의원의 발언내용에 대한 해석을 내림으로써 이 사건에 대한 독자들의 바른 이해에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우리는 먼저 `국시`에 대한 정의부터 바로 내려야 한다. 우선 우리나라 국어사전에 의하면, 국시(國是)는 "나라에서 세운 정책상의 기본이 되는 시정 방침, 나라 방침"이라 되어 있거니와, 여기서 보는 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침`(방법이 되는 원리)이지 국가가 달성하고자 하는 최고의 목표(목적)는 될 수가 없다. 또 10월 16일자 어느 일간신문이 밝힌 바와 같이 국시는 국가이념만큼은 중요하지 않고 그 아래에 있는 것이다. 즉 국가이념을 목표(aim, goal)라고 한다면 국시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정책(policy)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국가이념을 헌법 전문에 나타난 정신에 입각하여 볼 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민족적인 차원으로서는 민족의 평화적 통일이요, 둘째, 국내(국가)적인 차원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이요, 셋째로 국제(세계)적인 차원으로서는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중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그 기본정책으로서 반대하는 공산주의는 적어도 앞의 두 가지 문제에 직결되는 저해요소이다. 즉 첫째, 우리에게 있어서 민족의 통일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지상의 염원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의 통일은 추호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인간(어느 국가의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본래의 가장 기본적인 염원이 자유를 누리는 것인데, 그 자유를 말살하는 공산주의 아래의 통일은 그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산주의는 우리 민족의 지상의 염원인 통일까지도 무의미하게 하므로 민족과 국가, 그 어느 차원에서도 철저히 배격되고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반공법까지 제정하여 그러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반공은 그 개념의 성질상, 앞에서 본대로, 국가의 이념이나 목표가 될 수 없고 하나의 정책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민족적 염원인 평화적 통일에 기여하고, 우리의 국가질서인 자유민주주의에 기여할 뿐, 그 자체가 우리 민족과 국가의 지상의 염원이나 목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반공을 통일이나 자유민주주의와의 관계성 안에서 생각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국가의 이념이나 목표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러면 왜 이러한 개념상의 착오를 일으키는가? 그것은 5·16 이후 정부가 선언한 "반공을 국시의 제1위로 삼고…"라는 문구에서 `국시`라는 말을 국가의 이념이나 목표로 오해하는 데서 기인한다.(당시의 정부 자체도 이 `국시`라는 말을 바로 이해했는지 의심스럽다.) 이제 한 가지 예를 들어 해명해 보자. 만일 반공을 국가의 이념이나 목표라는(오해하는) 뜻으로서의 `국시`라고 생각하고, 가령 우리나라에 공산주의의 위협이 전연 없어서 그러한 반공이 전적으로 필요 없게 되었을 경우를 가상한다면, 그때는 우리나라가 국가의 이념이나 목표(잘못 쓰인 말로서 `국시`)가 없는 국가가 되고 만다는 비합리적인 논리가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좀더 논리적인 사고를 해볼 때,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한 헌법 전문과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성명은 국가의 목표(목적)와 정책(방법)이라는 주종적(主從的), 상하적(上下的) 관계에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민족이 분열되고 국토가 분단된 상태에 있는 만큼, 단순히 자유민주주의의 실현(분단된 채)만으로는 전 민족의 염원이 달성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거기에다 서독의 헌법 전문이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민족과 국가의 통일`을 첨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 `통일`은 분단국인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엄연한 국가적인 이념 또는 목표가 되고, 반공은 이 자유민주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정책 내지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논리상 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논리학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반공이란 앞서 본 바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명시된 대로, 민족적으로 통일(평화적)을 달성하고, 국가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고, 국제적으로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데 하나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못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앞서 말한 세 가지는 우리 국가와 민족이 끝까지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서 충분조건인 것이다. 이 통일은 분단상태로 있는 현재로서도 국가의 목표일 뿐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그 통일을 계속 유지해야 된다고 하는 점에서 여전히 국가의 목표가 될 수 있다.
다음, 유의원의 발언내용을 상술한 해석에 의거하여 살펴보자. "국가의 이익을 거시적으로 볼 때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보다는 통일이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란 말은 그 어구 사용에 있어서 필자가 이상에서 논한 것처럼 `통일`과 `반공`을 `국가이념`(목표)과 `국시`(정책)의 상관관계에서 각각 분명히 연결시키지는 않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 즉 반공이란 하나의 정책은 될 수 있지만 통일과 같이 국가이념 내지 목표는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교 1학년 사회 교과서에 (반공이 아닌) `민주통일이 대한민국의 국시`라고 한 것도 `국시`에 대한 이해는 달리했지만, 통일이 반공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만은 유 의원의 견해와 같은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유 의원의 말이 추호도 반공을 경시하거나 용공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은 그가 한 다음의 말에서 더욱 분명히 찾을 수 있다. "이 사람은 6·25 때 Ml소총을 가지고 가야산, 수도산 형제봉에서 공산당과 총격전을 한 반공투사이며, 지금이라도 북한 괴뢰정권이 침략해오면 이 유성환이가 먼저 나가서 싸우겠소. 나는 반공정책만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발전시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한 것이다. 이토록 분명한 반공성명에 대해서 "용공 이적행위"라느니, "공산화 통일까지 용인"이라느니, "반공국시 부정 망발"이라고 하니 필자가 가진 지식과 판단력으로써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당할 줄을 알았더라면 `통일`이라는 말 바로 다음에 "어디까지나 자유민주주의를 전제로 한"이란 무용지구(無用之句)라도 하나 덧붙였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으나,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이 나라의 국민 치고 이북의 간첩이 되었거나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반공을 포기하고 공산화 통일이라도 바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더구나 6·25를 체험한 세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닌가? 더욱이 그는 학생시절부터 누구보다도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것은 그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앙 있는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도 용공이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바라기는, 만에 하나라도 유 의원이 용공주의자라면 마땅히 처벌되어야 하겠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그의 진실이 사법부에서 속히 밝혀져서 지체 없이 석방되고, 그럼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실현의 한 면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 온 국민이 차제에 알아야 할 것은, 이 나라에서 가장 힘있고 효과 있는 반공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국민의 기본권이 철저히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1986.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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