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내가 차(車)를 한대 빌릴 터이니 꼭 참석해라"
언제나 친구들 모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여러 가지로 많은 봉사를 하는 김천연 사장이 전화를 해서 돌아오는 일요일에 초등학교 총동창회에 가자고 권유한 말이다. 특별히 올해는 우리 기(26회)가 회갑(回甲)년이라 후배들이 잔치를 해준다고 많이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라는 연락이 온 모양이다. 환절기라 몸살감기가 와서 집에서 쉬고 있는 중에 전화를 받고 잠시 혼란스럽기도 하면서도 졸업한 지가 사십 년이 더 되도록 단 한 번도 동창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무슨 환갑잔치라니, 우습기도 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동창들을 한번 만나고도 싶어져서 가보기로 했다.
"그럼 김 장군이랑 여 대표한테도 전화해서 꼭 가게 해라 그 사람들이 가야 빛이 나지"
"알았어! 내가 전화할게"
일학년에서 육학년까지 줄곧 한 반으로 졸업까지 한 68명 중에 육사를 나와서 별을 두 개나 달고 사단장까지 지내고 예편해서 정부 산하단체에 근무하는 김진항 장군과, 4학년까지만 다니다가 비교적 부유한 가정형편과 부모님의 교육열 덕분으로 서울로 전학 가서 엘리트코스만 거쳐 고시패스하고 부장판사 하다가 지금은 굴지의 법무법인 대표가 된 여상조 변호사를 두고 한 말이다.
이 두 사람은 우리 동창들의 자랑만이 아니고 고향사람들이 다 자랑으로 여기는 큰 인물들인데 군 향우회나 면 향우회에서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는 귀하신 몸들인지라 동창회에서도 당연히 꼭 모실 인물 일 순위인 것이다. 그런데 꼭 가겠다고 했다는 여 대표와 향우회 사무국장인 황국성도 못 가는 바람에 김 장군 과 김 사장, 나 그리고 또 한 명의 친구 이국록, 이렇게 네 명이서 출발하게 되었다. 새로 난 고속도로가 고향 성주를 통과하다 보니 그 전보다 한 시간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월 초, 모교인 금수초등학교 교정은 우리가 다닐 때의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벚나무는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지도 않은 채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농촌 인구감소로 인해 진작 폐교가 되어 지금은 `금수문화예술촌`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창작의 공간으로 쓰고 있어서, 고향에서 미술관을 하고 싶은 꿈을 갖고있는 나로서는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린 후배들이 뛰어 노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기도 했다.
간간이 만난 적이 있는 친구도 있긴 하지만 몇 십 년 만에 보는 동창생들은 전혀 알아 볼 수가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특히 여자들은 더한 것 같았다.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얼굴은 어릴 적 모습을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무정한 세월은 그렇게 우리를 할아버지 할머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선생님 누구 눈떴어요"
"야 임마! 눈감고 어떻게 봐?"
수업시간에 잘못해서 눈을 감은 채로 의자를 들고 단체로 벌을 서면서 일어난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그러던 아이들이 지금은 그만한 손자를 본 환갑노인이 되었으니 너무나 많은 날들을 보내고 이제야 우리가 만났구나 친구들아! 그때 벌을 주시던 담임선생님은 일찍 교직에서 물러나 사업을 하다가 현재는 신앙심이 깊으셔서 선교활동에 열심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오늘 같은 날 초대해서 모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었다. 십여 년 전 대구에서 개인전 오픈하는 날 직접 오셔서 축하를 해 주셨는데 그동안 전화도 자주 못 드린 게 죄송스럽기만 하다.
오랜만에 막걸리도 한잔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면서 그 옛날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서 맘껏 회포를 풀었다. 우리 26기 회장은 증평의 윤종수로 학교 다닐 때는 키가 제일 크고 달리기 선수였는데, 지금은 보통 키에 주름진 초로의 늙은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설운도의 원점을 제법 멋지게 불러 젖히는 폼이 술 한잔하면 노래방 출입을 꽤나 한 모양이다. 같은 마을에서 자란 친구 영득이를 통해서 먼저 간 친구의 비보도 접하고, 어릴 때 친하면서도 라이벌이었던 친구의 힘든 삶의 소식도 듣게 되고,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박초규 동창이 힘을 보태어서 오늘의 행사가 이루어진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성주 출신작가 4명의 글이 실린 문예지 한 박스를 가져간 나는 왠지 초라한 기분이었다. 양반고을이다 보니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고향의 정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회갑상 앞에 앉아 후배들의 절을 받으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회갑연을 고향에 와서 그것도, 어릴 적 추억이 서린 모교에서 치르게 되다니, 이런 행사가 계속 이어져서 좋은 전통으로 남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옛 추억도 되새기면서 또 새로운 추억도 만들고 정말이지 마냥 즐거웠다.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어제 헤어졌다 방금 만난 것처럼, 손에 손잡고 운동장을 뛰면서 그 옛날 천진한 아이들 모습이 되어 서로 함께 어우러져서 웃고 떠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 하루였다. 어릴 적엔 얌전하던 일기와 상동이, 내가 좋아했던 정득이, 날씬하던 몸매가 지금은 뚱순이가 되었는데도 어쩌면 다들 그렇게 막춤을 신나게 잘도 추는지, 관광버스 타고 놀러 다닌 적이 아마 한 두 번이 아니었으리라.
마지막으로 줄다리기를 하면서 그 옛날 운동회의 추억을 되살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년을 기약하면서 아쉬움 속에 헤어져 돌아와야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릴 적 온갖 사연이 담겨있는 모교를 찾아 친구들도 만나고, 좋은 시간을 보내긴 했는데, 부모님 산소에 들러 인사드리지 못하고 온 게 못내 아쉽고 죄스러웠다. 학교에서 십리나 되는 길을 걸어가기도 쉽지 않고, 행사 중에 누군가의 차를 빌리기도 마땅치 않고 해서 포기를 하였는데, 다음에 일부러라도 날을 잡아서 찾아 뵐 것을 다짐해본다.
그리도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 동창회 기사를 고향의 지역신문 두 곳 중에 한 신문에만 광고를 싣고 기사도 그 신문에서만 다룬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아팠다. 집행부의 대승적인 결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보았다.
아무튼 오랜만에 만난 고향친구들, 6년을 하루같이 웃고 울며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동창생들, 너무너무 반가웠고 앞으로는 더욱 건강들 해서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금수초등학교 26회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