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염치를 알고 도리를 지키며,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인품의 소유자를 양반이라 정의한다.
내가 느닷없이 양반타령을 하는 것은, 양반 향유병에 빠져있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 때문이다.
그 친구는 자녀들의 배우자를 선택할 때 첫째 조건이 양반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결혼 대상 처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양반 조건 충족 여부를 물었더니, 그 점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면서 "양반 하나는 끝내주는 왕족 전주 이씨입니다"라고 득의양양하기에 "이놈아! 왕족이라도 무수리 소생도 있고 가지각색이다. 경주 돌이면 다 옥돌인 줄 아느냐"며 면박을 했다는 것이다. 허상에 집착하여 실상인양 착각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단면이다.
달나라에 가는 이 시대에, 옛날과 같이 문벌 중심의 양반을 따질 세상은 분명히 아닌데도 양반만 지천에 넘치고 있다. 진품이 아니면서 진품의 가치나 효과만을 모방하는 키치양반이 득실거린다.
문득 `안동 예안(禮安) 고운 처녀 밭에 씨 할 고추`를 자랑하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과 함께 나의 이 대답에 무척 흐뭇해하시던 어머니의 함박웃음 머금은 얼굴이 떠오른다. 안동 예안이 어디에 있는지, 처녀 밭이 어떤 밭인지, 씨 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어머니께서 그 대답을 일러 주셨고 또 흡족해 하셨기 때문에, `안동 예안 고운 처녀 밭에 씨 할 고추`라고 뽐내고 자랑하며 다니기도 해서 집안 어른 분들께 웃음을 제공하기도 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약간 철이 들면서, 안동 예안이란 곳은 골기와집이 즐비하고, 곡간에는 맛좋은 음식이 쌓여 있는 풍성한 부자 동네이며, 고운 처녀 밭은 오곡이 풍성하게 자라는 기름진 밭일 것이란 상상의 그림을 펼칠 수 있었지만 `씨 한다`는 말의 참뜻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러다 중학교 입학한 후에야 `씨 한다`는 말의 뜻이 결혼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된다. 천석꾼 부잣집 맏아들로 서울 가서 공부했고, 나팔(트럼펫) 잘 불고, 사냥하러 총대 매고 나서면 위풍도 당당했던 사종숙(四從叔)께서 안동 예안 상계 종가로 장가가서 신행하던 날, 안동 예안 고운 처녀(실은 결혼했으니 아주머니다)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어린 내 가슴이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동 예안 고운 처녀`에 대한 나의 꿈이 너무 황홀했고 기대가 컸던 탓에 그에 대한 나의 꿈과 기대는 허무하게도 조각난 거울이 되었으며, 그날 이후 `안동 예안 고운 처녀 밭`에 대한 동경이 나의 뇌리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나 `안동 예안 고운 처녀 밭에 씨 할 고추`란 자존심과 긍지는 이성을 교제하면서 군림하려는 자만과 망설이게 하는 강박관념으로 작용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학교 입학하던 해에 첫사랑이란 열병에 빠져 실연의 아픔을 맛보았다. 그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상처투성이인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여행길에 상주의 한 인척 집에서 예안 땅 온혜에 살고 있는 친구(삼백당 종가 李)를 만나 상상 속에 그려왔던 예안 땅을 방문할 수 있었다. 빨래판 같이 요철이 심한 꼬부랑길을 짐을 가득 실은 고물트럭에 매달린 채 예안 땅에 도착했다. 일주일간을 이집 저집 다니며 차비까지 받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 시대에 대부분의 종가와 명문구가는 일제의 강점기와 토지개혁, 6·25사변 등 급변하는 소용돌이를 거치느라 경제적으로도 궁핍했으며 정신적으로도 혼돈의 늪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이곳 안동 예안 땅에서는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인 유산들이 보존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으며, 근본을 지키려는 확고한 신념과 유가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광맥 같은 면면한 정신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첩첩산중 굽이굽이 돌아서 한두 집 자리한 고색창연한 고가에서 금방이라도 헛기침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곳, 그곳에서 동병상련의 아픔과 함께 연대의식을 느꼈다.
집에 돌아와서 "어디 씨 할 데가 없어서 그 골짜기 밭에 씨를 뿌립니까?"하며 장난기어린 투정을 부렸지만, 지금 생각하니 실속 없는 허상에 집착했음이 틀림없다.
항상 근본을 잃지 말라고 일러주시던 어머니께서 이 아들이 `안동 예안 고운 처녀 밭`에 씨 뿌려주길 갈망한 근본적인 이유는 만인의 사표가 되신 훌륭한 퇴계 선생을 배출한 고장이기 때문이다. 근원이 길면 흐르는 물이 깊고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다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뼈대(조상의 정신) 있는 집안에서 배우자를 구하여 우리 집을 깊고 무성하게 하는데 정성을 함께 다하라는 간절한 바람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아둔하게도 늦게서야 깨달았다.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연분이 없었던지 `안동 예안 고운 처녀 밭`에 씨 뿌려 주길 바랐던 어머니의 염원은 무산되고 말았다. 집안 어른들의 생각엔 척박하기 짝이 없는, 명문대가도 아니고, 재력도 없고, 색혼(당파가 다른 집과의 혼인)의 멍에까지 써야 하는 조매계 선생의 터전인 김천 봉계땅 고운 처녀 밭에 씨를 뿌리는 연분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바람을 저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머니께서 염원했던 `안동 예안 고운 처녀 밭`은 안동 예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신 생전에 `우리 며느리 비단에 수놓았다`는 말씀으로 대신 인정하셨다. 어머니께서 안동 예안 고운 처녀 밭에 염원했던 기대 이상으로 인고를 기쁨으로 감내하면서 우리 집을 깊고 무성하게 가꾸고 북돋우는데 정성을 다해 왔기에 언제나 순금처럼 빛나 보이는 나의 아내였다. 나는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자부하면서 내 아들의 배우자 선택에도 어머니께서 일깨워주신 `안동 예안 고운 처녀 밭`의 심원한 뜻을 잊지 않고 어느 것이 실상이며 어느 것이 허상일까 냉철하게 곱씹어 보는 여유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내 아들에게도 `안동 예안 고운 처녀 밭`의 심원한 뜻과 바람을 새겨 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199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