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봄, 내가 대학 2학년 때의 일이었다. 기독교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때 나는 열심히 교회를 다녔고 따라서 신앙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마침 우리 과의 조영훈 군과 먼저 의기투합하는 친구가 되었다. 가난하고 낙후된 농민과 농촌을 위하여 한 손에는 빵을 들고 또 다른 손에는 성경을 들고 농촌 살리기 운동 을 전개하자고 말이다. 얼마 안 있어서 농학과를 다니고 있던 김정호 군과 함인수 군이 우리 두 사람의 모임에 합류하여 수요모임 형제의 수는 모두 4명으로 늘어났다. 수요모임이란 이름은 우리가 연습림 숲 속에서 매주 수요일 오후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토론을 벌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쳐진 이름이었다.
모임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던 1954년 봄에 우리는 2년 후배인 박신호 군을 우리 모임의 새 멤버로 맞이하였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신앙심 또한 남달랐다. 뿐만 아니라 청산유수와 같이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그의 말솜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 그는 궤변가처럼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떠벌리기도 하였는데,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그의 말에 되도록 귀를 기울여야 했다. 어쨌거나 그와 단번에 형제가 될 수 있었다.
그 친구의 생각과 행함이 우리와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지방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해 여름방학 때 내 고향인 성주를 거쳐 김정호의 고향인 경주를 다녀오는 4박 5일의 여행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 일행 다섯 사람이 첫날 오전 9시에 수원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김천으로 떠났다. 그때 기차는 왜 그리 느린지, 김천까지 무려 다섯 시간이나 걸렸다. 환기도 잘 안 되고 땀 냄새가 나는 그 차 안에서 우리는 김밥과 삶은 계란으로 끼니를 때웠다. 기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온갖 먹을 것을 파는 상인은 또한 어찌 그리도 많은지? 우리가 먹은 점심도 그 상인들에게 산 것이니 한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새로 들어온 이 막내는 어찌나 먹새가 좋은지. 먹은 지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또 배가 고프다고 먹을 것을 찾는 것이었다. 아마 그가 혼자 먹어 치운 계란만도 한줄(열 개)은 넘을 것이고 김밥도 3인분은 될 것이다. 우리 일행은 김천역에서 하차하여 이번에는 그날 마지막 성주행 버스를 타게 되었다. 오후 4시에 김천을 떠난 시외버스가 우리 동네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경이었다. 도착예배를 보고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역시 박신호 군에게는 밥 두 그릇이 제공되어야 했고. 우리가 초전에 있는 동안 반두를 들고 도랑에 나가서 물고기 사냥을 했다. 이 잡힌 물고기는 우리에게 진귀한 밥반찬이 되어주었다. 한 끼는 보리밥으로 요기를 하면 또 다른 한 끼는 국수로 끼니를 때우는 식으로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는지, 초전에서 2박을 하고 수원을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경주로 이동하는데 일행들은 초전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초전으로부터 경주까지의 이동은 시외버스로 이루어졌다. 물론 대구를 경유하여야 했다. 김정호네 식구들은 다 수원으로 옮긴 탓에 그곳에서는 정호 누님의 신세를 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닭고기와 돼지고기 등으로 영양보충을 할 수 있었다. 염치와 체면을 가리지 않는 박신호 군의 먹성이 초전에서 길을 잃길 바랐던 건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리 부탁을 했지만 막상 그를 위해서 2~3인분의 식사를 밥상에 올려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친구의 소화기관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건지, 화장실만 다녀오면 또 먹을 것을 찾는 것이었다.
시종일관 우리의 여행을 따랐던 것은 박신호 군의 먹성만은 아니었다. `농정대토론회`라 해야 할까, `신앙전도방법론`이라 해야 할까. 우리의 토론은 밤샐 줄 모르고 이어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런 토론이 벌어지면 나중에 감리교단의 목사가 된 조영훈 군과 농촌진흥청에서 박사가 된 박신호 군의 격론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가끔 나나 김정호 군이 몇 마디씩 거들곤 했으나 함인수는 아예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편이었다. 새벽녘에 잠시 눈을 부칠라 치면 천지가 무너질 듯한 박신호 군의 코고는 소리에 밖으로 내몰리기도 하였다. 그 덕에 아스라한 새벽별을 따라 이슬 내린 길을 걸을 수도 있었으니 한편으로는 고마운 일이기도 하였다.
그 후 세월이 가고 농촌도 변하고, 우리도 달라졌다. 한 사람은 교회 목사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박사가 되고 나는 교수가 되었다. 감사한 것은 그때 우리가 꿈꾸던 그런 잘 사는 농민, 부강한 농촌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농산물 시장개방화 문제 등으로 우리 농민의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초전으로 경주로 다니면서 벌인 토론 덕일 리는 만무하지만, 농촌의 생활환경, 교육과 복지 문제가 개선되고 있음을 볼 때, 그때의 기억이 새벽녘의 별빛처럼 아스라이 살아나곤 한다. (2000.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