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그 생리적인 구조에서 보면 고등동물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어서 생물학자들은 인간을 고등동물의 하나로 보거니와, 이 견해는 성경적인 인간관 즉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것과는 물론,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보는 동양적인 인간관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보는 견해는 인간을 윤리를 가진 도덕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것은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어서, 동물과 근본적으로 차별성을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인간을 동물의 범주에 넣는 것이 인간의 비인간성 즉 그 부패성과 타락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과연 인간이 본래적인 인간의 모습 즉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시 8:5)에서 하나님보다 `아주 못한 존재`로 떨어져서 인간의 당위성 즉 도덕적인 특성을 전적으로 잃어버렸다면 그때는 오히려 동물 즉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동물의 세계에서의 삶의 현상은 이성이나 양심이나 윤리 등과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것인데 대해, 인간의 특성은 이성이나 양심이나 윤리나 종교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그 당위성인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 이성이나 양심이나 윤리나 종교를 거슬러 사는 것이 그 삶의 현상이라면, 비록 그가 아무리 지성이나 기술이나 능력에 있어 뛰어나고, 고도의 문화적인 생활을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인간다운 것이 못되고 비인간적 또는 반인간적인 것이다. 반면, 동물의 세계에서는 어미가 새끼를 먹여 살리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더라도 그것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로서 가상할 일이 못되며, 또한 서로 약육강식의 참혹한 현상이 있음에도 그것이 비이성적이고 반도덕적인 행위라고 비난받지 않는 것은 그들 동물의 세계는 이성이나 도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 양심 윤리 도덕 종교 등의 삶의 원리가 작용하는 인간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그 당위적인 삶의 원리를 따른 한에 있어서는 가상할 일이 되지만, 반면 전적으로 그러한 삶의 원리를 거슬러 살 때는 인간으로서의 명분이나 가치나 권위가 상실될 것은 물론, 극도의 비난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 양심 윤리 도덕 종교 등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할 당위성이 있을 뿐 아니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당위성에 따라 그 삶의 원리로서, 유교에서는 인(仁이)나 오륜(五倫)의 도덕을 가르치고, 불교에서는 자비나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치고, 기독교에서는 사랑이나 십계명을 가르친다. 그리고 인간의 인격적인 구성요소를 지(知) 정(情) 의(意)로 보고, 추구해야 할 가치를 진(眞) 선(善) 미(美) 성(聖) 등으로, 또는 진리, 자유, 정의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진 선 미 성 등이 보다 개인성을 두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면, 진리 자유 정의는 보다 공동체성을 두고 말하는 삶의 목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제 이 세 가지로 오늘의 우리 사회 현실을 진단해 본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 대학의 삼대 명문이라고 하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교육이념이나 교가 가사에 나타난 최고의 가치를 보면, 서울대는 진리, 연세대는 진리와 자유, 고려대는 자유 정의 진리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역시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 진리 탐구의 전당이라 불리는 그대로, `진리`이다. 그리고 연세대는 기독교대학인지라, 성경 중 예수님의 말씀(요 8:32)을 따서 `진리와 자유`이고, 고려대는 `진리와 자유`에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다. 물론 서울대의 진리에도 자유와 정의가 제외되지 아니하고, 연세대의 진리와 자유에도 정의가 배제된 것이 아니고 다 같이 포괄하고 있으며, 고려대는 그 세 가지를 개별화하고 구별해서 낱낱이 강조한 것으로서, 진리는 정의에로 이르는 길이요, 자유는 정의가 실현된 결과임을 분명히 천명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 삼대 명문 대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전적으로 유린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의 현실이어서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러면 진리 자유 정의란 무엇인가?
첫째, 진리는 이성적 인간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명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형용사와 동사가 되어야 한다. 즉 우리의 삶이 참된 것이어야 하고, 또 참되게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현실은 그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개인 생활에 있어서나, 사회 국가적 생활에서 진리보다는 거짓이 더 날뛰고 통용되고 있다.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많은 경우에 진리가 거짓에게 희생되기도 하고, 거짓이 진리로 오해되기도 하였다. 세속의 역사에서만 아니고 종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 자신 `진리`라고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 서기관 등 유대 지도자들의 거짓된 독선과 독단에 의해 정죄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셨다. 진리와 정의의 세례자 요한도 똑같이 거짓과 불의의 무리에 의해 희생을 당하였다. 세속의 역사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에서도 진리가 거짓에 의해 유린 희생 당한 일, 예컨대, 이단 정죄를 잘못한 종교재판도 얼마든지 있다.
둘째, 자유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제일의 기본권이다. 우리나라 헌법에서도 국민의 기본권 중 첫째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생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자유로서,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이런 것이 없는 삶은 참된 삶이 아니요 죽음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까지 한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 자유의 유린은 흔히 독재국가의 국민들에게 심각한 것이다. 그러나 소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공동체의 자유가 반드시 다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루즈벨트의 유명한 소위 4대자유도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셋째, 정의는 진리가 왜곡되거나 자유가 유린될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실천의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정의의 실체적인 정의(定義)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대해서는 법이론상으로 논란이 있는데, 그것은 정의의 개념이 법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