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유림의 대표자이며 항일 민족운동가, 성균관대학교 창립자인 심산 김창숙(金昌淑, 1879 1962. 5. 10) 선생은 성주군 대가면 사월리 출생의 자랑스러운 성주인이다.
단재 신채호, 만해 한용운과 함께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는 삼절(三節)로 평가 받으며 반독재 투쟁, 민주화 운동, 민족교육 육성 등 평생토록 애국애족 정신을 발휘하며 역사의 귀감이 된 인물이다.
현재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마을에는 선생의 생가(경상북도 기념물 제83호), 청천서당, 청천서원 등 동강 김우 옹과 그 후손들의 흔적이 있어 소중한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2011년 3월 29일에는 서울 서초구 반포공원에 심산 김창숙 기념관 및 심산문화센터가 성황리에 개관해 그의 위대한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심산의 의열사상과 올곧은 선비정신을 선양하고 우리 역사의식 고취를 위한 장을 마련하기 위해 심산의열사적공원 조성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 되는 시점에서 이와 관련한 심층취재를 통해 청소년을 비롯한 지역주민에게 성주인의 자부심과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우고, 이를 통해 애향심 및 애국심 고취의 계기를 마련코자 한다.【편집자 주】
게재순서
■ 유년 및 청년기의 심산 김창숙
□ 항일독립 및 민주화 투쟁의 가운데에서
□ 심산 선생 선양사업을 위한 움직임
□ 기념비 등 유적 및 문화재를 찾아서
□ 자랑스러운 성주인 심산 김창숙 선생
심산 김창숙 선생은 경북 성주군 대가면 사월리에서 영남의 유학자 집안 출신이며 선조 때의 정승 김우옹의 12대손 칠봉(七峰) 김호림(金頀林)과 인동 장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이며, `김우(金愚)`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유년기 시절 김창숙은 부모로부터 가정교육을 엄격하게 받았다. 이 때 가정교육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통적 영남 유학자 집안에서 나오는 양반으로서의 행실이나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직업에 귀천이 없어 양반이나 그 외 평민이 다르지 않다는 가르침도 받았다.
그러한 예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그의 아버지 김호림은 서당에서 친구들과 학습 중이던 김창숙과 학생들을 불러내어 농부들의 노고를 지적하며 농사일을 도우라고 시켰다. 당시 사회에서는 양반과 농민들이 하는 일 사이에서는 분명한 선이 존재했었고 그 선을 넘어선 행동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식에서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물론 일반 민중들이 중심이 돼 봉기를 이룬 동학혁명이라는 측면에서 농민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잠깐 좋아졌다.) 아버지 김호림이 김창숙에게 농사일을 도우라고 시켰던 것은 어린 그에게 모든 직업에 귀천을 따질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돕게 하고 여자아이를 시켜 밥을 보낼 때는 늙은 종과 일꾼들에게 먼저 밥을 주고 자신의 자식과 학생들은 나중에 주는 등 아버지로부터 인간의 근본 도리를 중시하는 가르침을 터득하며 자랐다.
김창숙의 청년기는 오로지 항일독립운동과 민주화 투쟁으로 점철돼 있다. 항일운동을 하다가 발각돼 수차례 감옥에 가고, 나와서는 다시 앞장서서 투쟁하기를 반복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됐을 때는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상소해 체포됐으며, 친일단체인 일진회 성토 건의서를 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이 건의서에는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이 정확히 드러나고 있다. "학자들은 성리학의 깊은 뜻을 말할 뿐이었다. 나라가 기울어도 구제하는 일에 시급히 뛰어들지 않는 것을 보고 깊이 병들어 있음을 느꼈다. 성인의 글을 읽고서도 세상을 구제하려는 그 뜻을 깨우치지 못하니 이것이 거짓 선비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짓 선비들을 없애는 일이야 말로 나라를 바로 잡는 일이다" 불의에 항거하는 청년 김창숙의 용기와 투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수차례 옥살이를 하는 와중에도 일본 법률을 부인하기 때문에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하는 것은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라며 모든 변호사 선임을 거부하고 옥살이를 끝까지 버텨낸 모습에서도 곧은 지조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렇듯 심산 김창숙 선생이 일제강점기 시절을 지나 해방 후 죽기 전까지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가정교육 의 영향이 컸던 걸로 보인다. 유림이었지만 시대흐름을 꿰뚫어 보며 신분과 계급 타파, 그리고 실질을 중시하는 실학적 태도, 시대와 현실에 대한 변혁적 태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당시의 그의 스승들을 비롯한 재지사족들이 당시 제도의 제반 모순점을 신분제적인 제약 안에서 유교 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것에 반한다면 상당히 진보적이고 미래의 심미안을 지닌 인물이었다.
양반인 자신의 신분을 떠나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을 어릴 적부터 키워왔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거리낌 없이 한 몸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취재3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