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 유년 및 청년기의 심산 김창숙
■ 항일독립 및 민주화 투쟁의 가운데에서
□ 심산 선생 선양사업을 위한 움직임
□ 기념비 등 유적 및 문화재를 찾아서
□ 자랑스러운 성주인 심산 김창숙 선생
심산 김창숙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소를 올렸고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해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을 벌이다 수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고 성균관대 설립을 주도해 초대 총장을 지낸 바 있다. 이와 같이 항일독립운동과 민주화 투쟁으로 일관된 심산 김창숙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암울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되짚어보며 지역민에게 애국심 고취의 의미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심산 김창숙의 청장년기는 항일운동과 민주화 투쟁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왔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심산은 주로 대외적인 선전이나 섭외활동에 주력했다. 그 첫걸음이 1919년 `파리장서사건`이다. 3월 1일 발표된 선언서에 유교대표가 한 명도 없음을 알고는 "세상에서 고루하고 썩은 유교라도 매도할 때에 어찌 그 부끄러움을 견디겠는가"라며 크게 통탄했다.
이후 3.1독립선언이 민심을 움직여 국내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을 느끼고는 시야를 세계로 돌려 대한민국의 정세를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130여 명의 유림의 연명으로 된 장서를 작성해 세계에 알리고자 했지만 위기를 느낀 일제가 500여 명이나 되는 유림을 체포하는 이른바 `1차 유림단 사건`이 발발하게 된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은 독립운동에 있어서 유림의 참여라는 소극적 의의를 넘어 민족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3.1운동의 발전적 일환으로서 그 의의가 더욱 큰 것이었던 바, 바로 심산의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중국에 머물게 된 심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협의하고 임시의정원의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약했다. 또한 중국과의 대일 공동항쟁을 위해 중국인과의 교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20년대 일본의 문화통치와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분열과 대립으로 인해 독립운동이 잠시 주춤했던 적이 있다. 심산은 3.1운동 이후 식은 국민의 열기를 다시 끌어올리고자 1925년 북경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명분으로 모금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모금활동이 생각대로 되지 않은 채, 8개월 후에는 모금 활동한 사실이 탄로나 유림으로서 피검자가 600여 명에 달했다. 이것이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비록 두 사건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항일 투쟁을 위해 국내외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심산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성균관대학 설립 초대학장 취임
반독재 투쟁 외롭고 쓸쓸한 말년
1926년 7월 조선청년 나석주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 발생했다. 나석주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돼 있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인물이다. 나석주는 나라와 역사 위에 영원한 빛이 되기를 심산과 맹약하며 무기와 자금을 받았다.
일제의 통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두 건물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대한 폭파는 그 상징적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양국 모두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국민들에게는 독립에 대한 열망에 다시 불을 지피게 됐고, 일본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당시 이 모든 일이 나석주의 강개한 애국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에 앞서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일을 모든 자금을 마련하고 준비를 해 지시한 사람이 바로 심산이다. 여기에는 그동안의 모금이나 집회와 같은 소극적 항일운동에서 더 나아가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파괴활동과 같은 적극적 활동도 서슴지 않았던 심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심산에게 일제의 견제는 당연한 일이었고 수없이 체포되기를 반복하면서 때로는 회유를, 때로는 모진 고문도 당했다. 인물의 실체는 역경에 처했을 때 두드러지는 법이다. 일제 타도를 위해 독립전선에 나섰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오히려 호통을 치며 죽음을 불사하는 저항은 보통 사람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비범한 모습이다.
마침내 일본이 패망하고 심산이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 광복이 이뤄졌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심산은 일본에게서 독립 후 어수선한 국내 분위기를 정리하기 위해 민족의 분열을 가장 경계했다. 각자 서로 다른 이념과 다른 정파에 의거한 수많은 단체가 난입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할 때, 중립적 입장에서 민족과 국토의 분열을 조장하는 모든 단체를 단호히 배격했다.
심산은 1946년 `반탁담화문`을 발표하며 신탁통치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싸울 것을 호소한다. 또 동아일보를 통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조선공산당에 경고문을 발표해 공산당의 행위를 매국 민족반역행위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난립된 유도회 조직을 통합하고 성균관대학을 설립해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2년 후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등과 함께 남한만의 총선거에 불참한다는 내용의 `7거두 공동성명`을 선언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서울을 떠나지 않고 인민군으로부터 협조 요청을 받았으나 거부하고, 1.4후퇴로 부산 피난 중에는 `이승만대통령 하야경고문` 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됐다. 이승만의 폭압적인 통치기간 동안 심산은 야당 어느 정치인 보다 더 격렬하게 싸우고 저항했으나, 결국 이승만 세력에게 성균관 대학을 빼앗긴다. 이승만 정부는 폭력을 동원해 유도회를 장악, 심산 중심의 정통 유림세력을 축출하고 기독교 신자인 자신을 유도회 총재에, 역시 기독교 신자인 이기붕을 최고 고문으로 추대 취임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다.
1957년 성균관대학 운영, 유도회 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나, 1960년 `이대통령 사퇴 권고`를 발표하는 등 그의 반독재 투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후 심산은 집 한 칸도 없이 궁핍한 생활 속에서 여관과 병원을 전전했고, 그의 셋째 아들이 서울에서 자동차 운전기사를 해 벌어온 돈으로 간신히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1965년 서울중앙의료원에서 84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취재3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