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 유년 및 청년기의 심산 김창숙
□ 항일독립 및 민주화 투쟁의 가운데에서
□ 심산 선생 선양사업을 위한 움직임
■ 기념비 등 유적 및 문화재를 찾아서
□ 자랑스러운 성주인 심산 김창숙 선생
현재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마을에는 심산 김창숙의 생가(경상북도 기념물 제83호), 청천서당(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61호) 등 동강 김우옹과 그 후손들의 흔적이 있어 소중한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들 유적 및 문화재에 얽힌 정보와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그동안 미처 모르고 있었던 심산 김창숙의 역사적 가치나 의미 등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해 본다.【편집자 주】
성주군 대가면은 역사상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던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대가`라는 지명도 `큰 인물, 즉 대가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라는 뜻이다.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은 의성 김씨들의 집성촌으로 동강 김우옹 선생과 심산 김창숙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여기에는 심산 김창숙의 생가와 청천서당, 청천 서원 등이 잘 보존돼 있어, 문화적 가치가 큰 곳으로 평가 받으며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먼저 경상북도 기념물 제83호로 지정돼 있는 심산 김창숙의 생가다. 현재의 건물은 심산이 22세 때인 고종 38년(1901년)에 일어난 화재로 불에 탄 것을 중수 개축한 것이다. 1901년 화재 이전 건물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대로부터 세거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산의 생가는 안채만 현존하며 정면 4칸 측면 1칸의 -자형 집에 홑처마 우진각 기와지붕의 구조로 돼 있다. 좌측부터 부엌, 안방, 마루, 건넌방 순으로 평면 구성돼 있으며 건넌방 뒤로는 반침이 있고 대청 앞쪽엔 유리창문을 달았다. 건물 내에는 13대조인 동강 김우옹의 저서 `속자치통감목`의 목판본이 보관돼 있다.
현재 생가에는 실제 심산의 며느리인 손응교 여사(95)가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며느리의 생활은 무척이나 팍팍했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수절을 택했다. 손응교 여사는 일제 때 국내외 독립 운동가들에게 보내는 선생의 비밀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 곳곳을 다녔다. "아버님이 주시는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주를 두 번, 중국 본토를 한 번 다녀왔고, 국내는 30여 차례를 오갔지. 만주에는 기차를 타고 갔지만 많이 걷기도 했어. 처음엔 무슨 편지인지 몰랐어. 나중에 독립운동과 관련한 편지란 걸 알았지.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애를 업고 만주에 간 적이 있는데 편지는 포대기 안에 꼭꼭 숨겼어"
심산이 돌아가실 때까지 병수발을 들며 한 평생 외롭고 고된 삶을 살았던 며느리를 위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하여 담뱃불을 붙여 달라면서 담배를 가르친 시아버지로서의 심산의 일화가 지금껏 진한 여운으로 전해지고 있다.
1991년 5월 14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된 청천서당은 동강 김우옹(1540~1603)을 봉양하기 위해 지어진 청천서원의 후신으로 1729년(영조 5)에 세워졌다. 김우옹 선생은 벼슬과 학행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조선 중엽의 선비였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학문을 폭넓게 공부했으며, 벼슬길에 올라서는 고위관직을 두루 거쳤다. 김우옹 선생은 인재를 추천하고 무고한 관리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주위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청천서원은 회연서원과 함께 성주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었으며,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된 것을 심산의 부친 김호림에 의해 청천서당으로 개칭해 복원됐다. 서원은 넓은 마당에 산뜻한 목조건물로 들어서 있으며 현판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이다. 건물은 장방형 토석담을 두르고 앞면 5칸, 옆면 한 칸 반으로 구성돼 있다.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각지붕이다. 전방에 3칸 대문채와 남쪽에 3칸 일자형 관리사가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서당 담장 밖 북쪽에는 김우옹의 불천위사당이 방형(方形) 토석담 안에 자리하고 있다.
1910년에는 심산이 청천서당을 성명학교(星明學校)라 칭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위한 장소로 활용하며 한때 머물던 장소이기도 하다.
파리장서사건 기념비도 빼놓을 수 없다. 파리장서사건 혹은 유림독립선언은 1919년 심산 등 유림의 인사들이 주동이 돼 파리평화회의에 독립탄원서를 보내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3.1운동 이후 유림의 인사들은 유림이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를 대신해 파리장서에 서명을 했다. 한국의 유림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명이 심산의 연락으로 독립탄원서를 작성, 심산이 이 탄원서를 가지고 상하이에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우송했으나 발각돼 대다수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며, 곽종석·하용제·김복한 등은 감옥에서 순국했고, 그 외 많은 사람들도 고문에 못 이겨 죽거나 처형됐다.
장서의 주요 내용은 한국은 삼천리강토와 2천 만 인구, 4천 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돼야 하며, 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병합으로 변하게 했고, 한국인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고,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3.1만세운동 주동자 중 많은 인사들이 일제의 끈질긴 회유책에 넘어가 변절했으나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의 선비 137인은 악랄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선비의 기개를 지켰다.
이렇듯 파리장서사건을 기념하는 비가 밀양의 영남루 인근에 세워져 있으며 정읍의 장읍사 공원에도 기념비가 있다. 장충단 공원에도 파리장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심산을 기릴 수 있는 더 많은 유적 및 문화재가 없어 안타깝지만, 자랑스러운 별고을 성주인이자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마지막 유림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추앙 받고 있는 심산 김창숙 선생의 발자취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은 물론 지역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올곧은 선비정신을 본받아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취재3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