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 년 전에 내가 상당골에 있는 성주중학교를 다니는 통학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칠선동에서 계속 성주김천간 신작로를 따라서 가다가 댓대고개를 넘은 다음 금산동으로 들어가서 시골길을 한 2km 더 가서 학교 동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칠선동에서 논두렁길과 오솔길을 따라가다가 용성동 뒷뫼마을을 지나서 학교 서쪽 대나무밭을 지나서 들어가는 길이다.
후자의 코스로 통학하는 경우, 칠선동과 용성동에서 초전초등학교를 다니는 꼬마들을 만나게 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우리 중학생들과 반대방향으로 통학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중학교 상급반이 되었을 무렵 뒷뫼마을로부터 초전초등학교를 다니던 Y여학생의 나에 대한 눈빛이 유난히도 반짝이던 것을 느꼈다. 도대체 사랑이라는 말 자체를 알지 못했을 내가 그 여학생의 눈길을 의식할 리 만무하였다. 6.25동란 후에 나는 대학으로, 그 여학생은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어 자연히 통학 길에서 만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때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하학 길에 우리가 뒷뫼마을 앞 뚝방에 있는 큰 버드나무에서 쉬고 있는데, 물론 담배를 피우는 남학생들은 거기서 담배연기 한 모금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때마침 초전초등학교에서 자기 집으로 하학하던 Y여학생을 거기서 만났다. 그 여학생은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늦지 않으면 자기 집에 잠시 다녀가라는 것이었다. 그 뚝방에서 머지않은 그 여학생이 사는 초가집에 당도하였을 때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그때 시골에 먹을 것이라곤 이렇다 할 것이 없는 때였다. 그 어머니께서 잘생긴 무 한 개를 주셨다. 공부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출출함을 느끼던 터라 나는 그 무를 참 맛있게 먹었다. 그녀의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고 그 어머니는 왜소한데다가 몹시 병약해 보였다.
내가 대학교를 마칠 무렵, 중학교를 다닐 것으로 짐작이 되는 그 Y학생으로부터 `그리운 오빠에게`라는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외로운 생각이 어린 자기에게 엄습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등, 그런 때에 오빠가 옆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는 등 단순한 안부편지라기보다는 좀 진한 편지 내용이었다. 얼마간의 세월이 더 가고 난 다음 내가 지금의 우리 집사람과 사랑의 교제를 한다는 것을 안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연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생각건대 요즈음 대부분의 여자들이 사랑하는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다가 결혼을 하고 나면 "자기" 또는 "여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아마도 그 옛날 그 시골에서 Y여학생이 남자 연인을 오빠라고 불렀던 원조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J후배가 우리 대학 임학과로 들어왔다. 참 얌전하고 공부밖에 모르는 착실한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해 방학 때 시골에 가서 그 Y학생과 J후배를 만나게스리 주선을 해주었다. 그 후 그들의 사랑은 무르익었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며 아들과 딸을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그 남편 J후배는 내가 교수생활을 하고 있던 수원캠퍼스 부근에 있는 임목육종연구소에서 연구생활을 하였고 그들이 사는 집도 내가 다니던 교회 부근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교회생활을 나와 같이 하게 되었다. 내 평생 중매에 성공한 것은 Y여학생의 경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을 밝혀 두고자 한다.
2004년 가을 어느 날, J후배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들려왔다. 원래 그 후배는 술을 즐기는 편이었고 술을 마시고 나면 공격적인 말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날도 정년퇴직한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술도 약간 마신 그가 길을 건너다가 결국 이런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J후배가 타계한 지 1년쯤 지나서 이번에는 Y여사가 별세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 천진난만하던 초등학생 Y양은 나에 대한 연심을 뒤로 두고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두 내외가 모두 고희를 못 넘긴 채 말이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어도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가 없다고 한 것인가? 인생은 정녕 구름처럼 흘러가는 것 같다(2005.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