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정 성주여중 3학년
중학교 1학년때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판문점을 배경으로 하여 남북한 군인들이 몰래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초코파이를 나눠 먹는 등의 우정이야기와 그 우정을 다른 인물에게 발각되어 결국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되는 총격이야기가 그 주요 내용이다. `정말 우리군과 북한군의 경계가 저런 선 하나일까?` `그 선하나 사이에서 총을 겨누며 서로 눈싸움을 하고 있는 걸까?` 여러 의문이 생겼었는데 영화 속에서만 보던 그 판문점을 학교대표로 가게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성밖숲에 모여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지난 밤 온갖 기대로 밤잠을 설쳤지만 가는길 내내 설레는 마음으로 조금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정 5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2km씩 떨어진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의 지역, 비무장지대 DMZ였다. 지나가는 곳곳에 군인들이 위엄 있게 서 있었고, 넓은 들판과 시골풍경이 많았다. 사람들이 쉽게 와 볼 수 없는 곳이라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우리가 견학한 곳은 제 3땅굴이었다. 땅굴이란 북한이 남한 기습작전을 목적으로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에 파놓은 굴로, 무려 20여개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땅굴내부의 높이는 꽤 낮아서 안전모를 쓰고 고개를 숙이며 가야했다. 벽 곳곳에는 노란색의 동그란 자국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북한군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자국이라고 한다. 이 다이너마이트가 설치된 구멍이 남한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남침용임을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서울과 불과 44km 떨어진 이곳에서 승용차로는 겨우 45분, 1시간당 무려 3만 명의 병력이 통과할 수 있다는 이 무시무시한 땅굴을 보며, 한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긴장을 늦추지 않고 늘 경계하는 마음이 이미 남북 양측의 곳곳을 침투해 황폐화 시켜놓은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땅굴에서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했다. 판문점은 유엔과 공산측이 회의를 운영하기 위해 군사분계선 상에 설치한 공동경비구역이다. 처음에는 북한군과 남한군이 이곳에서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고, 말 그대로 공동경비구역이었지만 1978년 도끼만행사건 이후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이 분할되었다. 판문점은 DMZ안에서도 최남단이고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그래서 입구에서부터 신분증 검사를 하고, 판문점 내에서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숙지하고, 무리이탈과 개인행동으로 생긴 피해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에 서명을 했다. 까다로운 절차가 끝난 후 드디어 판문점 안으로 들어갔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군인 아저씨의 간단한 설명도 들었다. 판문점 안의 대성동마을에 있는 초등학교 졸업식은 넘치도록 많은 선물과 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만큼 위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작은 배려인 셈이다. 한반도 같은 땅에 사는 같은 민족임에도 그어놓은 선 하나에 위험이라는 팻말을 붙여 배려를 하고 안하고를 따지는 것이 잘못된 일인 것 만 같아 자꾸 뒤돌아보게 되었다. 잠시 뒤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는데 정말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듯 했다. 그러나 영화 속 배경은 실제 판문점이 아닌 남양주종합촬영소 세트장이라고 한다. 군인아저씨의 설명 중 실제 판문점과 영화 속 판문점의 다른점이 세가지 정도 더 있었는데, 첫째는 남한군과 북한군이 초코파이를 나눠먹는 모습은 절대 있을 수가 없고, 둘째는 이곳 군인들은 신장이 176cm이상부터 될 수가 있어서 이병헌은 JSA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영애 같은 여자는 근력과 지구력이 부족해서 판문점의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것 이었다. 군인아저씨의 말에 버스는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막상 내렸을 때에는 초코파이를 나눠먹기는커녕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군사분계선 하나를 경계로 서로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군인아저씨 중에서 몸을 반틈 가리고서 있는 분들이 많았는데, 비상시에 총을 빨리 꺼낼 수 있고, 신속하게 피할 수 있는 동작이라고 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하루종일 경계를 늦추지 않는 북한군과 남한군 ... 우리는 한민족, 같은 동포인데도 이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경계선 너머에는 북한건물인 판문각과 북한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 북한군에게 손가락질을 하거나 비웃는 등 조금이라도 빌미를 제공하면 북한군이 도발 행위를 할 수도 있다는 경비대대 헌병군인의 주의에, 보두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싹 가셨다. 무섭고 떨렸다. 저 멀리 북한군이 망원경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이곳에 와보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우리가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판문각 앞에는 세 개의 하늘색 건물이 있었는데 t-2라고 적힌 건물 안에는 헌병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있었다. 그 단단한 주먹을 보며 목숨걸고 나라의 안보를 지켜주는 군인들에게 고마움이 느껴졌다. 두 명의 헌병 중 한명은 북쪽으로 통하는 벽과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등 뒤로는 바로 북한땅 이라고 했다. 문만 열면 오갈 수 있는 사이다. 저 얇은 벽하나 사이, 남한과 북한을 막고 있는 벽은 그리 단단하고 두꺼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상과 이념의 벽만은 그 누구도 쉽게 허물 수 없는 단단하고도 두꺼운 벽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착잡해진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벌써 이동할 시간이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판문점 기행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잠시 스쳐지나갔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포로 교환이 실시되면서 한번 건너가면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여 이런 비극적인 이름을 갖게 된 다리이다. 도끼만행사건으로 순직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워둔 기념비도 보았다. 도끼만행사건은 1976년 7월 미군과 국군이 해마다 해오던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중 북한군 30여명이 도끼와 쇠망치를 휘둘러 미군장교 2명이 순직한 사건이다. 경계지역의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암묵의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발한 북측군인과 그 도발에 순직한 미군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잠시 묵상했다. 판문점을 다녀와서 같은 민족이 갈라져 있다는 사실에 가슴 아픔을 느꼈지만 더욱 심각하게 느낀 것은 현재 우리들의 안보의식이었다. 지금 우리들의 안보의식은, 휴전상태가 50년 넘게 오랫동안 지속되고,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어느정도 익숙해지면서,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6·25 전쟁에 희생된 군인들이 점점 더 잊혀지게 되어 전쟁과 통일에 대한 의식이 무뎌지고 있다. 판문점이 단순한 관광지로만 여겨지는 현실 또한 우리들의 안보의식과 더불어 개선되어야 할 점이다. 그리운 마음, 보고픈 마음 참으며, 살아도 사는게 아닌 이산가족을 위해서, 일분일초도 눈을 떼지 않고 서로 경계하며 같은 민족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 아저씨들을 위해서도 하루빨리 평화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치 누가 더 높은지 다투듯이 솟아있던 대성동 자유의 마을 100m높이에 달린 남한 국기게양대와 기정동 선정마을 160m높이에 달린 북한 국기게양대... 이제는 우리의 서로 다른 국기가 어긋난 우리들의 마음, 서로 다른 사상, 이념과 함께 하나로 합쳐져 높이 높이 휘날리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