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 김창숙 선생은 대한민국 대표 유림으로서 단재 신채호, 백범 김 구 선생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지사로 꼽히지만 이들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것도 사실이다. 선생은 조국독립을 위해 일제에 맨몸으로 저항하다가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두 아들을 나라에 바쳐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과 민족통일운동을 벌인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추앙받음이 마땅하여 선생의 행적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본 연재는 `한국근대사상가선집⑤ 心山思想硏究會編(한길사 발행)`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발행 金昌淑 編(권기훈 지음)` `심산 김창숙 평전(김삼웅 지음, 시대의 창) 등 여러 心山 관련 참고 문헌에서 발췌,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김창숙(1879∼1962)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유학자, 교육가,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이며, 유도회를 출범 시켰다. 해방 후 통일운동과 함께 반독재 투쟁을 위해 한 때 정치가로도 활동했다.
80평생을 민족과 국가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킨 올곧은 선비정신의 소유자다. 반침략, 반분단, 반독재 등 투쟁과 희생으로 청렴·강직한 지조를 지키면서 일생을 바친 민족혁명가다.
심산은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과 차남은 모두 독립운동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장남 환기(1908∼1927)는 김창숙 선생이 베이징에 망명 중일 때 그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잠시 귀국하였다가 체포되어 일경의 고문 후유증과 병이 겹쳐 사망하고 말았다.
차남 찬기(1915∼1945)는 1928년 1월 17일 진주고등보통학교의 맹휴를 주도하여 1929년 11월에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5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 왜관으로 옮겨 청년연합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9년 2월 이른바 `왜관사건`에 대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1941년 가석방되었다. 그는 1943년 일경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부친의 주선으로 중경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이후 환국을 앞두고 1945년 10월에 사망하였다.
김창숙은 사돈 관계를 역시 독립운동가와 맺었다. 둘째 딸은 김창숙의 군자금 모집활동 때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형을 받은 이재락의 며느리로 출가 시켰다. 역시 군자금 모집활동으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 받은 손후익의 차녀를 둘째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이분이 시아버지인 김창숙이 돌아가실 때 까지 병수발로 정성을 다 했고, 지금 심산 생가를 지키고 있는 손응교(95) 여사다.
손 여사에게, 가까이서 본 시아버님, 심산 김창숙 선생은 어떤 분이었는지 물어 보았다.
"결혼하고 대전 형무소에 수감 중이셨던 시아버님을 처음으로 뵈었다"며 "시아버님은 일생을 독립운동과 함께 유학자로서 민족사학 육성, 그리고 반독재 투쟁에 바치신 참으로 꼿꼿한 삶을 사신 분"이라고 한마디로 말한다.
스물일곱에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을 잃은 둘째 며느리 손 여사는 시아버님의 심부름인 `밀서` 전달을 위해 국내는 물론이고 만주로, 중국을 누빈 숨은 독립유공자이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하체가 부자유스러운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드는 청상의 며느리를 안타깝게 여긴 심산은 담뱃불을 붙여달라는 핑계로 며느리에게 담배를 가르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담배 한 대로 잠시나마 근심을 잊으라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심산은 1962년 3·1절에 정부가 주는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수여받고 무척 좋아했지만, 그 해 5월 10일 84세를 1기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사회장으로 엄수됐으며 수유리 산 127-4 묘지에 안장, 영면했다.
매년 5월 10일 심산 기일에는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심산기념사업회와 성균관대학교 관계자, 유도회 관계자 그리고 선생의 고향에서 성주군수를 비롯한 각급 기관장 등 많은 사람들이 수유리 선영에 모여 추모제를 올린다. 지난 5월 10일은 제49주기 추모제가 엄수됐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병환중인 심산에게 박정희 의장의 병문안을 받았으나 심산은 돌아누우며 외면하여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선생이 남긴 시문집으로 심산문존, 심산만초, 벽옹만초가 있고, 자서전 벽옹칠십삼년회상기와 유고집으로 심산유고 등 저서를 남겼다.
◇심산 김창숙선생 기념관 건립
심산 김창숙은 단재 신채호, 백범 김 구 선생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지사로 꼽히지만 이들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것도 사실이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2011년 3월 29일 서초구 반포근린공원에 `심산 김창숙선생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심산기념관은 지하2층 지상3층 연면적 8,438㎡(2,553평) 규모로 총사업비 172억 원을 투입 완공했다.
심산 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중위)와 기념관건립추진위에 따르면 국가보훈처와 서초구청, 그리고 독지가의 지원을 받아 공사기간 30여 개월 만에 개관식을 가졌다.
1층 `심산 기념관`은 선생의 동상과 유품, 사진 및 자료 등을 수집 전시해 심산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묻어나 선생의 선비사상과 정신의 계승·발전 공간으로 활용토록 했다.
영남 유림의 후손으로 태어난 선생은 1962년 5월 10일 세상을 뜰 때까지 을사오적 처단 상소,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상, 반 이승만 독재 투쟁 등 행적을 따라가며 선생의 활동상을 보여준다. 심산과 동시대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및 한국 근현대사를 장식한 다양한 인물에 대해 소개하는 `기획전시실`도 마련돼 있다.
그리고 심산의 일대기 및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줘 어린이 교육장으로도 활용 가능한 `영상교육관` 등으로 민족정체성교육의 요람이 되도록 운영할 예정이라 한다.
심산은 항일운동과 반독재 운동을 펼친 투쟁가로서의 삶 이외에 성균관 및 유도회를 재건한 유학자로서, 성균관대학을 설립할 정도로 민족사학 육성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던 교육자로서 그의 면모를 되새겨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셈이다.
또 다양한 유학 및 한문학 자료를 갖춘 `유학자료실`, 유아부터 일반인까지 한문, 경전교육, 인성교육도 함께 받을 수 있는 `한학교육실`, 유학자들이 입던 도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제를 올리는 체험 공간 `우리역사 체험장`, 청소년들이 향학열을 태울 수 있는 `독서실; 등도 마련됐다.
만시지탄이지만, 이제라도 이러한 공간이 마련되어 후세 교육과 심산 선생의 정신을 재조명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